푸른 물결타고 온 세 공주는 탐라국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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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랑국은 탐진현 다도해 실제 존재…역사 격랑기 잃어버린 이름 찾아야
제주를 흔히 말하기를 삼다삼무(三多三無)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가 될것이다.또한 여자만의 걸어온 생활의 단면을 소개하는 의미도 있으리라.

여자들은 바다에서 육지에서 밤낮으로 남자 이상으로 이 섬을 지켜온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고개를 내 젓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여자의 위치는 중요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위치에 함께 있어야 할 여자가 벽랑국 세 공주이다.

이 세 공주가 바닷가에 도착할 당시 광경을 잠시살펴 보면

벽랑국 세 공주 아버지가 사자(使者)를 통해 전한 이야기가 있다. “부왕께서 이르기를 탐라국에는 땅에서 신인(神人) 세 사람이 솟아나와서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 데 도와 줄 배필이 없으니 가서 짝이 되어 도와주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공주 세 분은 모두 하늘이 정해주신 것이니 앞으로 나라를 세우고 자손 만대에 번영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이들 세 공주를 안내한 사자는 함께 싣고온 사목함을 건내주고 간데 온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삼을나는 사자가 이야기 한대로 그 상자 안에 알 모양으로 된 옥함이 있었고, 관대를 하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옥함을 지키고 있었다. 옥함을 여니, 그 속에는 푸른옷을 입은 처녀가 셋 있었다.

이 말은 벽랑국 부왕뿐 아니라 세상 모든 부모들이 멀리 떠나 보내는 딸을 향해 당부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여자부모의 입장을 헤아릴 듯 하다. 세 공주가 낳고 기른 벽랑국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벽랑국과 세공주를 상상 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설령 벽랑국이 하늘에 있건 바다 깊숙이 숨어있었던 간에 우리 곁에 있어야 했다. 고·량·부 세 을나가 탐라국을 개국한 이 땅의 성조(聖祖)라면 이들 세 공주는 탐라국의 성모(聖母)인 것이다.

세 신인을 찾아온 벽랑국과 세공주가 이름없는 별로 떠돌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제주바다에 떠 돌고 있는 이들의 혼령들을 위로하고 축원을 드릴때가 온 것으로 보아진다..

필자는 불에 탄 초가집도 옛 터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실날같은 희망이 항시 떠나지 않았다.

벽랑국을 찾는 탐험작업은 필자로서는 참으로 외로운 싸움이었다.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해변에서 물새 발자국처럼 지워질 것 같으면서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빛바랜 언어들을 줍는 심정으로 찾아 나섰다.

올해는 1996년 5월 통나무 몇 조각 되는 떼배에 몸을 맡기고 일본 오도 열도를 거쳐 나가사키로 노저어 갔던 첫 탐험항해를 해온 지 꼭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탐험의 배경은 우리민족이 고대 일본을 탄생 시킨 민족 대이동의 뿌리를 찾는 항해였다. 아직도 나는 이 항해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벽랑국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탐험항해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세 차례 일본의 뿌리를 찾는 탐험항해를 하였다. 이런 가운데 벽랑국은 고대로부터 가장 많은 뱃길 왕래가 있었던 탐진현 다도해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단지 시대가 바뀌면서 역사의 격랑기에 지명을 잃고 떠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나서 한반도 지명들은 당의 영향력에 밀려 많은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의 한반도를 강점하고서도 많은 국토의 지명들을 잃었다. 이것은 나라 잃고 여지 없이 겪는 수난의 한 과정이였다. 제주의 4·3! 이 섬에도 잃어버린 마을지명들이 수 없이 많다. 그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

<채바다 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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