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떠나 일본 땅에서 늘 고향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또 겨레에게 무엇을 어떻게 남길까? 늘 고민하면서 평생 일편단심 조국애과 민족애로 교육 사업에 일관한 한 제주 출신 교포가 있었다. 이는 조천읍 신촌리 태생인 조규훈(曺圭訓) 선생으로서 서거한지 여러 해 지나서야 이런 훌륭한 사실이 조명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 2010년 가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주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최근 그를 현양하려는 뜻있는 교포 이정림(李正林) 등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현창(顯彰)사업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얼마나 장하지 않은가!

 

조규훈선생은 1906년 조선환(曺璇煥)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직 국권회복의 길과 후진을 가르치는 길만이 고향을 위한 지상목표로 여겼다. 1944년 7월 독립사상가로 고배(神戶) 병대에 끌려가 48일 동안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등 전쟁 중에는 일본의 기피인물이었다. 마침 해방의 환희 속에서 동포를 규합하여 백두동지회(회원 60여명)를 조직했다. 한편 벌목업에 손대어 건축재목과 모든 자재를 고향으로 반입, 1946년 조천중학교를 개설하였으니 지금 교정에는 당시의 공적비가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선생은 해방공간에서 60만 교포의 숙원사업인 교민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오사카로 건너갔으니 이곳은 제주교민이 가장 많이 살기 때문이다. 마침 1947년 4월 교포 이경태(李慶泰)에 의해 전년에 세운 건국공업학교와 건국고등여학교의 통합하여 스스로 건국중학교의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건국고등학교와 1949년에는 건국소학교를 설립, 동년 5월에 재단법인 백두(白頭)학원을 인가받아 초대 이사장에 조규훈선생이 취임하게 되었다. 이는 그이 희생적인 교육관과 동포애에 대한 믿음이 알려졌기에 가능하였다. 이런 일로 그는 대한민국거류민단 제7대·8대 단장으로 당선되어 한국대사관 건물 신축비로 거금을 희사했다.

 

이런 기쁨도 얼마가지 않아 조국의 산하는 피로 물 드리는 처절한 싸움이 터졌다. 교포사회도 38선으로 갈라져 좌우의 갈등과 투쟁은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1951년에는 일본의 정규학교로 인가되었으되 이후 20년 동안 부득이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국가관 정립을 유보한 채 조총련(朝總聯)의 재정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런 불행한 와중에 드디어 제5대 이사장 강신길(姜信吉)이 취임하여 교육에 무관하고 정치투쟁에 광분하는 조총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977년 광복절에 처음으로 학교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학교는 일본 대판부(大阪府) 오사카시 수미요시(住吉區)에 위치한 이 학원은 유치원·소학교·중학교·고등하교로 편성되었다. 학교 본관에는 교실 39개, 강당을 겸한 체육관과 관리실을 갖추었다. 제주사람은 이런 훌륭한 인물을 찾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묻혀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호유피인유명(虎留皮人留名)이란 말은 되새기게 하고 그런 인물을 현창하고자 하는 삶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