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4월이 오면 4.3사건을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제주 사람들은 서북청년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공산주의는 싫다고 하여 빈 몸으로 38선을 넘어 군경에 투신하여 외롭게 싸워나가자니 지독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북은 어디인가! 흔히 서북은 평안도를, 동북은 함경도를 지칭한다. 허나 해방 이후 서북은 월남 난민을 모두 지칭하는 경우이니 서북청년은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까지를 포함한 청년들이 모임이다. 이들 가운데 제주에서는 문형순(文亨淳)에 대한 이야기와 그를 바로 알고자 하는 인간 재조명 작업의 설득력 있게 움직이고 있다.

필자는 문형순에 대하여 “1901년생, 함북 태생, 4.3축성 창안자, 일제강점기 중국에 망명, 만주에서 10년, 중국에서 10년, 경찰에 투신한 뒤 만주에서 마적단(馬賊團)에 응전하기 위해 축성한 경험을 살려 1948년 가을 4.3축성을 제안, 이를 수용하여 마을마다 축성하여 게릴라를 제압했다. 1949년 제주서와 서귀서 외로 성산포경찰서와 모슬포경찰서를 새로 개설할 때 그는 성산포서 초대 서장으로 1년 11개월 재임하다. 1950년 6.25 남침으로 예비검속을 할 때 제주도경은 각서마다 250-500여 명을 경찰에서 신분을 조사 확인한 뒤에 계엄군에 인계한 일이 있었다. 곧 살생부였다. 문서장은 당시 6명만을 보고하고 나머지는 사상온건하다고 보고한 의인으로 오늘까지 알려졌다.”라고 써 왔다. 이는 이북5도사무소 소장 채수민씨로부터 내가 들은 바를 보태어 기록한 바, 이제 와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근래 와서 독립 공훈을 알게 되어 붓을 들었다. “가명 이도일(李道日), 일명 문시영(文時映), 독립운동가는 가명을 많이 썼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 가입, 중앙호위대장 및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만주․노령 계열 독립운동’ 항목에 기록된 바, 최근 보훈지청 문건에 남아 있다. 그는 1945년 월남 1947년 7월에 경찰관교습소 교두 겸임 및 제1구경찰서(현 제주서) 기동대장, 동 10월에 경위로 한림지서장이었다.

후일 재미교포 이도영의 ‘백조일손지묘가 말하는 전쟁 시기 제주도 양민학살’이란 글을 ‘역사비평’에 게재, 그 글에 “추정하건데 제주서 400-500명, 서귀서와 모슬포서 각각 250명, 성산포서 6명 등이 학살되거나 암매장되었다.”라고, 모슬포의 ‘경찰서장 문형순 공덕비’는 한때 그의 공적에 반하는 악질 서청이라고 폄훼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사후 평북도민회 공동묘지에 안장시킨 서청 동지에 의해 재조명되고 제주보훈지청과 경우회 등에 의해 그의 참된 생애가 밝혀져 나가고 있다.

문형순은 1897년 2얼 7일 평남 안주군 대로면 의서리 163번지에서 태어나 가본적을 성산읍 성산리 195번지로 정했다. 한때 경남도경 함안경찰서 서장으로 1년 지내고 제주로 들어와 쌀 배급소를 운영하며 가난과 싸웠다. 1966년 6월 20일에 70세로 제주도립병원에서 외로운 몸으로 생을 마쳤다. 박대통령의 하사금이 내려와 평안도민회의 금일봉을 합쳐 공동묘지에 안장, 후일 혹자에 의해 서청(西靑)의 비석이라 하여 내리쳐서 두 동강이로 나갔다. 그러나 서청 동지들에 이해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평안도 사람의 성격을 흔히 맹호출림이라 한다. 문형순도 나라를 다시 찾자고, 인권을 존중하자고, 치안을 담당하자고, 공산당을 쳐부수자고, 싸웠던 호랑이었다. 젊은 때는 일본군과 대적하고, 공산당 타도에 받친 그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여 제주충혼묘지로 옮겨 충혼을 기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서청은 모두가 악질이 아니라 그 중에도 협신제약 약제사 김관용(金寬容), ‘한라산개방-평화비’를 정상에 세운 허창순(許昌洵), 제주농업중학교 교장 우덕제(禹德濟) 등은 오래 도민의 기억에 남을 서북의 사나이다운 사나이다.<제주도교육의정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