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0년을 돌아 보건데 개인의 힘으로 ‘이상 농촌’을 실현하려던 선각자를 찾는다면 백창유(白昌由)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선각자 백창유에 대한 글은 한 줄도 없다. 그는 병원을 유치해 낙후된 주민의 의료보건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학교를 설립하여 민도를 한층 높이려고 하였다. 다음 수로를 개척하여 논밭을 만들어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려고 실천한 개척적인 인물이자 선각자(先覺者)다.

맹자는 ‘사선지각후지(使先知覺後知)하고, 사선각각후각야(使先覺覺後覺也)’라 하였으니 이는 곧 줄여 풀이한다면 선각자란 ‘남보다 앞서서 먼저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다.

백창유가 설립한 애월읍 신엄리 소재 사립 일신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4월 1일 구엄리 소재 구엄공립국민학교의 개설로 자진 폐쇄되었다. 일본인 교장을 채용하라는 당국의 지시를 거부한 까닭이다. 사립 일신교의 모든 공장부와 서류는 구엄교로 인계, 1945년 8.15 해방이 되고 1948년 4.3사건으로 무장공비(武裝共匪)에 의해 당직자 3명이 순직하고 학교 건물은 전소를 당했다. 이로써 학교의 내력도 알 수 없어 부득이 최근 구술로 전해지는 바와 여러 문헌과 문건에서 찾아 필자는 제주교육사의 일부로 정리하려 한다. 특히 사립 일신학교의 말기에 근무했던 학교 직원 강 모씨(고성 출신)의 희미한 증언은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선각자 백창유는 신엄리에서 5형제의 맏이로 태어나서 일본 규슈(九洲)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 재력을 갖게 되자 이상촌 건설이란 꿈과 향토의 교육과 농토개량의 일을 실천했다.

그는 첫째 의료기관을 유치하여 주민의 보건이생과 건강에 관심을 보였다. 먼저 알고 지내는 제주읍 도두리에 수보의원을 개업한 애월 출신 장익준(張益俊)을 설득시켜 신엄리로 병원을 이설하게 하니 이 병원은 애월면에 처음 개설한 의료기관이다. 이곳에서 1922년에 아들 장시영(張時英)을 낳았다. 당시 현대의학의 중요성을 이해 못해 미신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세태에 실망도 너무나 컸기에 현대적 병원의 개설을 서둘렀다.

그는 둘째, 암울했던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사립 일신학교를 세워 문화생활을 접하고, 문명사회의 도입을 갈구했다. 일신학교는 13회의 졸업생 780명을 배출, 후일 국회의원, 장관, 민단 중앙의 의장 등이 배출하였다. 여타는 해방된 조국의 값진 동량이 되었다. 이뿐인가! 그의 ‘이상농촌-실현’이란 원대한 꿈은 정부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하귀 가문동 출신으로 일신학교 졸업생인 고완천(高完泉)은 백창유의 민족교육관에 깊이 매료, 후일 사립 귀일중학교를 개설, 개척적인 후진양성을 건학의 목표로 삼았고, 7촌 조카 백정혁(白丁赫)은 공립 신엄중학교를 유치했다. 아들과 손자는 모두 은연중에 애국정신과 구국교육이란 부조(父祖)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고 있다.

넷째, 어승생 물을 끌어와 논밭을 가꾸려던 꿈은 해방 이후 정부도 이를 인정, 광령 수리사업으로 발전되고 1961년 5.16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어승생 용수개발로 발전, 오늘날 제주도민의 일상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오늘 광령리 ‘배한이-드르’의 수로를 찾아가 보라. 그의 꿈은 민본(民本) 사상에서 움텄다고 하겠다.

일신학교의 교명 일신(日新)은 공자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날마다 새로워져라)’에서 인용한 것이며, 이는 주민을 날로 새롭게 하고, 새로운 창조인이 되도록 하자는 데서 정해진 이름이다. 한편 주자도 ‘중용(中庸)’의 장구(章句) 서문에서 ‘일신월성(日新月盛.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왕성해져야 한다)이라 하지 않았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우선 백창유의 생애와 높은 이상, 그의 강한 실천력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실학사상에서 우러나온 백창유의 생애를 앞으로 탐구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작년까지 학교 건물 벽체는 남아 있었으나 이도 허물어 벌여 학교의 유허지(遺虛地)로서의 구실은 사라졌다. 앞으로 자그마한 표지물이라도 남겨 후생들로 하여금 선각자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제주도교육의정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