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우여곡절...제주 기개 드높이고 위기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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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제주 65년 3) 사회분야...태풍.해난.항공사고 피해도
▲ 1970년 12월 15일 발생한 남영호 침몰 사건을 보도한 본지.

제주일보는 대한민국 광복 이후 지난 65년간 격변의 현장속에서 제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 그야말로 시대마다 사회상을 담아냈다.

태풍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는 추석절 새벽에 엄습한 ‘사라호’를 비롯해 잦은 태풍에 살인적인 강풍에 시달려야 했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하늘에서, 바다에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제주 4.3사건 등과 연루된 희생, 제주의 기개를 높인 산사나이들의 쾌거와 산화, 살인과 납치 등 강력사건, 해군기지 갈등 등 숱한 우여곡절의 사연도 있었다.

하지만 동문공설시장 화재, 남영호 침몰 등 어려운 시기마다 도민들의 성금 모금 등 훈훈한 온정이 이어지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이제 제주일보는 지령 2만호를 맞아 도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사건.사고들을 간추려보고 앞으로 이웃들과 함께 웃음꽃을 피우는 감동의 제주, 화합과 통합의 새로운 역사를 담아내기를 기대해본다.

 

▲ 광복과 우키시마마루호 사건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보’가 1945년 10월 1일 발행한 창간호에는 미국군 사령관 파우엘 대령과의 회견, 일본군 작전참모와의 회견을 통해 한국인 생명과 재산 보장책,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철수일자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한국인 550여 명이 광복을 맞아 같은 해 8월 24일 귀환하기 위해 탔던 당시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가 부산으로 향하다 교토 근처 마이쓰루만에서 의문의 폭발로 침몰한 사건을 다뤘다.

▲ 4.3사건과 제주도 유지 구속사건

1948년 4.3 사건은 좌.우익간 보복테러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

1950년 8월 9일 김좌천 제주지방법원장, 원복범 제주지방검사장, 홍순원 제주도 총무국장 등 각급 기관장과 유지들이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에 구속된다. 구속 사유는 인민군의 본도 상륙에 대비해 ‘인민군 상륙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혐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군 정보장교의 무고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주일보는 1960년 5월 25일자 ‘4.3 및 유지사건.양민학살 폭로의 때’ 기사를 대서특필, 억울하게 학살된 양민들이 후세를 위해서도 엄격히 식별되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 동문공설시장 화재

1954년 3월 13일 당시 도내 유일의 상설시장이었던 동문공설시장에 화재가 발생해 사망 2명, 이재민 2600여 명, 가옥 소실 480여 세대, 총피해액은 1억7900여 만환에 달했다.
당시 제주신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화재 터전에는 이재민들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집이 있던 자리로 보이는 잿더미 속을 헤치며 울부짖고 있었다’고 참상을 묘사했다. 제주신보는 3월 14일부터 구제동정금품(의연금품) 모집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 고달픈 보릿고개

1957년은 ‘40년 만의 대흉년’으로 기록됐다.

1957년 2월 2일 당시 제주신보는 ‘추수한 지 석달 밖에 되지 않은 농촌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 전분 찌꺼기 등 가축사료와 톳, 파래 등 해조류로 연명하는 참상을 빚고 있다. 어린이들은 이러한 거친 음식을 소화시킬 일이 없어 심각한 영양실조에 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 납치.살인 등 강력사건

1958년 1월 23일 제주경찰서장 관사 마루 밑에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수사 결과 전 경찰서장이 1957년 10월 부인을 전기줄로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2년 8월23일 제주시내 한 고교생이 납치돼 살인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납치된 고교생 아버지 회사에 임시 고용됐던 서모씨로 노름빚에 쪼들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1997년 8월 14일 제주시 관덕정 인근 공사장에서는 30대 단란주점 여종업원이 신체 일부가 잘려진 알몸사체로 발견됐는데 현재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007년 3월 16일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초등생이 실종됐다 39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다. 범인은 숨진 초등생의 이웃주민으로 큰 충격을 줬다.

지난해 2월 1일에는 20대 어린이집 보육교사 피살사건이 발생했는데 아직까지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 ‘사라호’와 태풍 피해

추석절인 1959년 9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사라호 태풍이 제주 전역을 강타했다. 제주신보는 당시 인명피해가 사망.실종 11명을 비롯 사상자가 140여명에 이르렀고 6만5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 규모도 32억5000만환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제주신보는 사설을 통해 ‘사라호 태풍은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까 하는 재앙이었다’며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인류애의 척도를 저울질할 수 있다’고 이재민 구원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48년 후 2007년 9월 16일 ‘나리’ 태풍은 ‘사상 최악의 물난리’로 기록될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인명피해는 사망 13명, 부상 1명이었으며, 재산피해는 1307억4600만원에 이르렀다.

▲ 남영호 침몰과 해난 사고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50분께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쓰시마섬 서쪽 100마일 해역에서 전복, 침몰되는 해난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326명의 승객이 사망하고 재산피해는 1억700만원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제주신문은 남영호 희생자 조위금품 접수를 하는 등 유가족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1984년 4월18일에는 동남 잠보카훼리가 제주항을 출발, 부산으로 가던 도중 조난을 당해 구명정을 타고 다른 카훼리선으로 옮겨 타려던 14명 중 12명이 높은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다.

▲ 산사나이들의 쾌거와 산화
1977년 9월 15일 제주 출신 산악인 고상돈씨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하지만 그는 1979년 5월 29일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봉 정복에 성공한 후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인해 숨졌다.

1992년 5월20일에는 제주대 맥킨리 원정대가 대학 개교 40주년을 맞아 맥킨리 정복에 나섰다가 악천후를 만나 원정대원 6명 중 3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의 오희준씨도 1999년 초오유봉을 시작으로 2006년까지 해발 8000m급 10좌 등정, 남극점과 북극점 정복에 성공했지만 2007년 5월 16일 고상돈 대원의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을 기념해 원정대 부대장으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유명을 달리했다.

▲ 천제연 구름다리와 교량 붕괴

1981년 12월 17일 천제연에 가설 중이던 현수교가 붕괴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천제연 제2폭포 아래에 시설하던 관광용 구름다리가 계곡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 다리 위에서 작업중이던 인부 등이 함께 떨어져 11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빚어졌다.

당시 제주신문은 임시취재반을 구성, ‘육중한 다리가 순식간에 50m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계곡 암반은 피바다를 이뤘고 교량에 깔린 인부들은 살려달라는 절규로 아비규환을 이뤘다’고 호외에 이어, 12월18일자 1면과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KAL기 폭발과 항공기 사고

1994년 8월10일 승객 152명과 승무원 8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제주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를 이탈, 폭발하면서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탑승객들은 인근 전경부대의 도움으로 모두 탈출에 성공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에 앞서 1982년 2월5일 전두환 대통령의 연두순시를 앞두고 외곽경비를 맡게될 장병들을 태우고 제주에 오던 군용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방부는 사고 다음날인 6일 ‘5일 작전훈련중이던 군용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 육군과 공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권력형 땅투기 ‘대지사건’
1984년 7월 당시 제주신문은 사회면 머릿기사로 ‘지역 및 도시계획사업 전문기술업체인 대지 종합기술공사는 81년 7월 서귀포시와 도시기본계획 용역을 계약, 개발계획을 짜면서 개발대상지구인 서호동 1432번지 등 10여 필지 2만5000여 ㎡의 과수원과 임야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이 특종보도는 이후 전국의 언론이 1개월 이상 주요 기사로 보도했고 정치권의 핫이슈로 부각했는데 이 회사 대표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더욱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돈 선거’로 얼룩진 교육감 선거

2004년 1월 15일 치러진 제11대 제주도교육감 선거는 ‘돈 선거’로 얼룩지면서 제주사회가 큰 충격에 빠져 들었다.

교육감 당선자를 비롯해 후보자 4명 전원이 구속됐다. 교사와 학부모 등 이 사건과 관련해 경찰조사를 받은 인원만도 480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43명은 구속, 77명은 불구속됐다.

▲ 해군기지 찬.반 갈등

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싼 논란은 1992년 처음 시작됐고 2005년 4월 재추진되면서 확산, 찬.반 갈등을 불러왔다.

급기야 2009년 6월 29일 반대측인 일부 시민사회단체와 강정마을회 등이 김태환 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같은 해 8월 26일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됐지만 투표율(11%)이 개표요건(총 투표권자의 3분의 1)에 못 미치면서 부결됐고 김태환 지사는 지사직에 복귀했다.

해군기지 갈등은 제주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고 현재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김재범 기자 kimjb@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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