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그들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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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원,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

제주가 ‘탐라’라는 건 이미 예전부터 잘 알려져 왔다. 하지만 탐라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고, 탐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도민은 얼마나 될까? 이런 물음으로 최근 제주학연구센터 주관으로 고대탐라문화의 수수께끼 ‘탐라복(耽羅鰒), 도라악(度羅樂)’이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탐라의 대외교류에 관한 것으로 고대 일본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에서 확인되는 8세기 중반 유물인 목간(木簡)에 탐라복이라 쓰였고, 속일본기에 731년 도라악이 기록돼 있다. 이 목간은 1963년 나라지방의 헤이조궁(平城宮)터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745년 탐라복 6근을 공물로 바쳤다는 내용이다. 탐라복을 제주에서 직접 가져 왔냐는 논쟁이 뜨거웠다. 제주 전복과 같은 질 좋은 품종이라는 설, 탐라의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공물로 바쳤다는 설 등이 논쟁거리였다. 또 다른 문헌에 738년 ‘탐라방포(耽羅方脯)’가 등장하는데 이는 사슴이나 멧돼지 고기를 말린 것으로 공물로 바치기 위한 제주산이 분명해 보인다. 탐라복도 말린 전복일 가능성이 많다.

도라악은 탐라악으로 62인으로 구성된 악공과 군무형태의 제주무속 음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도라가 제주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뜨거웠다. 제주는 탐라 이외에도 섭라, 도라, 탐모라, 탁라 등 여러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제주가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고대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에는 도라악과 관련된 장검 1자루와 의복 관련품이 있는데 대부분 속옷이나 버선 등이다. 이 유물은 동아시아 스타일로 남장 무녀, 북을 사용한 대편성된 군무 형태로 추정하고 있다.

고문헌인 일본서기 혹은 속일본기를 보면 6세기 이후부터 7세기 후반까지 20건이 넘는 탐라 관련 기사가 남아 있다. 대부분 사신왕래에 대한 기록이다. 탐라왕자 이름도 나오는데, 아파기, 유리도라, 구마기, 아파예 등이며, 다른 백제벼슬인 좌평이란 이름도 등장한다. 아울러 오곡종자, 비단, 명주, 도끼, 칼 등 물품을 받아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당시는 큐슈지방의 후쿠오현 다자이후가 주요 거점지로 탐라가 일본에 도착한 지명도 남아 있다. 이로써 일본과 대외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교류한 탐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정치적 교류와 함께 중개무역이든 직접적인 교역이든 전문상인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고고학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대 탐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비단 일본뿐이겠는가? 우리나라 고문헌인 삼국사기에도 탐라가 자주 등장하고 중국의 고문헌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665년 중국의 당 고종이 신라, 왜 등과 함께 탐라가 태산에서 회합을 가졌다는 기록은 고대 동아시아 주변국들과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준다.

지금 제주는 도시화의 물결, 개발 붐으로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다. 모든 것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곳곳에서 제주 천혜의 자연환경과 정체성을 지키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앞으로 제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논의와 정립이 필요하다. 나아가 탐라의 실체를 규명하는 연구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져 역사적인 정체성을 확립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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