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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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경남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에 밝힌 8년 만의 고백은 한국 사회를 미투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말한다”고. 기습적인 강타였다.

그날 이후, 트위터에서 미투는 2만 건 이상 솟아올랐으며, SNS에서의 고백과 공감의 말들과 열띤 응원이 뒤따랐다. 미투는 하루에도 5, 6000 건씩 이어지다 문화예술계의 미투 이후 다시 트위터에서 피해자들의 고백이 1만 8000 건으로 늘었다 한다. 이전에는 없던 놀라운 일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원로 시인의 망측한 추태에 분노했다. 여류들이 함께한 주석에서 어찌어찌했다니, 그러면서 용기 운운했다니. 도대체 그런 해괴한 일도 있는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우상이 돼 온 그가 그런 행태를 했다는 게 명백한 사실로 떠오르자 넋을 놓고 이 땅의 문인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런 모습을 두고 ‘천재성’ 어쩌고 하기도 했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한동안 함구 끝에 그것도 외신을 통해 ‘자신은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 했으니, 그의 시는 영혼의 언어가 아니었나. 이 대목에 문제가 있다. 한마디 말을 할 때가 됐는데도, “언어가 떠나버려서”라 얼버무린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성찰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월의식인가. 우리 나이 86세, 시 이전에 자연인으로서 곱게 늙어야 할 나이이거늘, 참으로 그의 노회(老獪)함이 슬프다.

“문학계 원로 시인이란 분이 어떻게 지금껏 떠받들어지며 살 수 있었는지 기가 찬 노릇이다.” 수원 광교산 자락, 대문이 굳게 닫힌 저택 앞에서 내뱉었다는 한 시민의 말이다. 참담한 심경이었을 테다. 안 그래도 독자보다 시인이 많다고, 저 혼자의 넋두리라는 작금의 난해한 시에 식상한 독자들이다. 이제 대중이 시를 버릴지도 모른다. 문단의 위기다.

미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고은, 조민기, 박재동, 이윤택, 안희정으로 흐른다. 문화예술을 치고 나오더니 급기야 정치권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일 년 전, 대선 경선에서 차기지도자로 급부상했던 안희정 씨, 그는 또 무언가. 비서를 성폭행하면서 “괘념치 말거라. 잊어라.”라고 한 그의 지엄한 선언(?)의 말. 어느 교주의 음성으로 들리지 않는가.

짚어야 할 게 있다. 성추문의 뿌리가 남성 중심 위계질서와 우월감에서 비롯했다는 자각. ‘이제 여직원들과 일 못하겠네.’ 하는 것은 미투에 빼딱한 한국 남성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그런 시선이 피해 고백을 ‘꽃뱀론’, ‘음모론’으로 몰아 폄훼한다. 가당치 않은 발상이다.

데이터는 숫자를 보여 준다. 하지만 숫자 뒤에 보이지 않는 고백자들의 말 속에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가득하다.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내 안의 미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피해자가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들린다. “저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요. 몸조심했어야 했는데,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는데….” 한국여성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하나씩은 미투가 나올 거란 얘기가 있다.

누구처럼 ‘나는 여성과 악수를 한 적이 없다.’는 식은 안된다. 무책임한 말의 유희다. 미투 당사자, 그들의 목소리는 낮지만 목숨을 내놓은 포효다. 대충 넘어가려는 것은 미투를 흐지부지하게 하는 함정이다.

남성들이 참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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