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영곡공을 공경하고 따른 제주판관…‘권학입지’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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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설대-고갑평, 오사카서 교포 문맹자에 한글 교육
고경수高京守, 제주농업학교 학생 항일 활동
고경준, 예조좌랑 등 거쳐 제주판관 등용
▲ 제주시 오라2동 소재 조설대의 전경.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로 조설대(朝雪臺)라는 한자를 새긴 바위언덕이다. 제주시 오라동 출신 이응호 선생을 중심으로 젊은 유림 12인이 문연서당에서 구국항일운동의 결사체인 ‘집의계’를 결성했다. 이들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침탈당하자 같은 해 12월 연미마을 망곡단으로 달려가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며 그 울분을 바위에 새겨넣었다. 그 징표가 바로 조설대다.

 

▲고갑평高甲平:1914(일제강점기)~1985, 성심야학誠心夜學의 항일활동.

 

제주시 삼도리<제주-성안> 고영일高永日의 장남, 그는 오사카 ‘히가시나리구’東成區에서 1936년 3월 이봉춘李奉春(우도), 김주삼金柱三(조천), 김성종金性鍾(평대) 등과 함께 교포 문맹자文盲者 20~30명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는 1943년 11월 26일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일본의 패전으로 석방했고 오사카에서 타계했다.


한글로 된 한국 독립의 창가를 지어 합창하게 하고 교재는 한국 역사와 교육을 주안점으로 가르쳤으며 야학소의 시험 발표회, 망년회, 신년회 등에 참석한 생도들에게 “한국도 옛날 독립국가로서 각자 자유와 권리를 누려왔다. 일본에 병합되면서 한국인이란 차별로 구속을 받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이것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일본의 압정壓政 아래에서 떠나 옛날 한국인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경수高景洙①:1898(광무2)~1983, 전우田愚의 문하생, 자는 앙여仰汝, 호는 문연文淵 혹은 문재文齋. 제주시 오라동<오라위> 고석구高錫九의 아들이다.


전북 계화도로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학문을 배워 반외세 사상으로 일관했다.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으로 한시를 잘 지었고, 1916년 오라동 사평 마을에 이신호李信鎬가 사평숙沙坪塾이라는 한문서당을 개설하고 그를 훈장으로 초빙하자 1925년까지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조국이 해방이 되고 1948년 4·3 사건으로 은사 이응호가 지은 ‘탁라국서’를 자신의 필사본으로 잘 보존해 오늘날에 전해지게 했다.


1978년에 ‘대한광복의사비大韓光復義士碑’비문을 짓고 조설대朝雪台에 비를 건립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그의 부친 고석구의 영향과 은사 이응호, 스승 전우田愚의 훈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부친 고석구(1854~1939)는 오라동 태생으로 조설대 12동지의 한 사람이며 자는 경주卿疇, 호는 후백와後柏窩 또는 모송재慕松齋라 하고, 어려서부터 충직하고 어린이와 벗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당하자 왜제에 일체 불복, 일본 제품이면 의복, 음식, 생활용품마저도 전혀 쓰지 않고 일본 관헌과는 만나지도 않고 납세도 거절하여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고경수高京守②:1916~1935(일제 강점기), 한림읍 귀덕리<복덕-개>에서 태어났다.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 활동. 1931년 8월 1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 판결이 있자 항소하여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고경수高京守(18, 일도) 등은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5년을 확정받았다.


고경수 등 9명은 교무실에 들어가 심한 저항을 하여 전원 경찰에 구금되었다.


3월 10일 교장 관사로 찾아가 교장이 출타한 상태여서 교장 부인에게 항변하고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마침 교장을 만나러 왔던 도립 제주병원 원장 지바<千葉>는 이를 보고 경찰에 알리자 붙잡혀 구속되었다.

 

▲고경준高景晙:1839(헌종5)~1897(광무1), 문신. 자는 진경晋卿, 호는 영운靈雲, 제주판관.


오현중·고교 교장 고영천高永千의 고조부이다.


항상 방조인 영곡 고득종高得宗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모든 행동과 문장까지도 영곡풍을 따르니 아호도 그래서 영운이라 한 것이다.


진해현감 고처량高處亮의 5세손으로 1839년(헌종5) 9월 29일 애월읍 수산리의 속칭 ‘오름-가름’에서 아버지 한주漢柱와 어머니 양梁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 때에 노형동 ‘너븐드르廣坪’ 연주현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이후 줄곧 처가에 살면서 오현단에 있는 귤림서원에 나가 글공부를 하였다.


1863년(철종14) 초가을 제주찰리사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이 내도하여 과장科場을 열어 시제試題는 ‘궐포귤유석공부厥包橘柚錫貢賦(귤과 유자를 보따리에 싸서 조공함)’이었다.


문과 별시에서 을과乙科로 뽑혔으며 그의 문장과 재질을 발휘하고 이어 승문원 부정자, 종친부 부정,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함경도 안변의 고산高山 찰방, 강원 원주의 보안保安 찰방, 예조좌랑, 1865년(고종2) 승문원의 부정자가 되었다.


이 해에 고종 임금이 관물헌觀物軒에 납시어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등 입시入侍한 모두에게 ‘보작명寶酌銘’을 짓게 하였다.


이때 영운靈雲이 지은 글이 최고 수작으로 뽑혀 그의 문장력이 중앙에까지 알려지고 그 글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866년(고종3)부터 부사과副司果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함경도 안변의 고산찰방 겸 춘추관 기서관記書官, 전라도사全羅都事, 강원도 원주의 보안保安찰방, 종친부정宗親府正, 편수관, 예조좌랑 등을 거쳐 제주판관으로 등용됐다.


제주판관으로 재임하면서는 더욱 민심 순화와 빈민 구호에 남달리 힘쓰는 한편 이조판서 김상현金尙鉉에게 올린 근조상십사謹條上十事라는 상소문을 통해 “식년과, 경과慶科 등을 제주도에서 한성시나 호남시를 보기 위해 출륙하는 번거로움과 제반 경비의 소모를 덜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영운의 문학성에 대하여서는 소疏·서書·부賦·시詩·발跋·문文 등 할 것 없이 일본을 항상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특히 고향 제주를 아끼고 제주인을 사랑했던 애향의 진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관계를 떠난 1880년대 후반부터는 제주의 한 야인으로서 후생들을 가르치고 문묘에 나아가 권학입지勸學立志의 길을 역설했다. 또 향리에서는 충신계忠信契를 중심으로 한 십의(十義:父慈·子孝·兄良·弟弟·夫義·婦聽·長惠·幼順·君仁·臣忠)의 도를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행동은 이조판서 및 대제학을 역임한 김상현金尙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운이 상경한 후 관계에 있을 때 김상현의 집에서 10여 년간 유숙하면서 사사하였던 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1897년(광무1) 12월 5일, 관계에 투신한 후 줄곧 살아온 제주시 이도일동 1372번지에서 향년 59세로 타계하였다.


따라서 충군애국·육영애민育英愛民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기려 ‘판관 고경준선정비’가 삼성사 서쪽에, 또 ‘판관 고경준거사비去思碑’가 화북 비석거리에, 또 등영구登瀛丘(방선문) 동벽 암벽에 ‘판관 고경준’이라고 음각된 글씨가 남아 있는데 영운의 고귀한 발자취를 높이 평가한 징표라고 하겠다.

 

그가 타계한 지 90년 만에 증손 고대종高大鐘에 의해 유고를 모아 오문복吳文福이 번역, 1989년 그의 문집 <영운집靈雲集>이 발간되자 그의 인물됨이 널리 알려졌다.


※(필자의 변) : 영곡공이나 영운공은 고씨 집안에서 자랑하는 인물이다. 영운공의 선친묘는 ‘물미-오름’ 자락 명당자리에 터를 잡아 대제학大提學 김상현金尙鉉이 비문을 지었다. 제주도에 대제학의 비문은 오직 이곳뿐이다. 하루는 한학자 오문복吳文福(신풍리) 선생을 모시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도 묘자리를 보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앞에는 수산水山저수지에 멀리 보이는 한라산 참으로 장하게 보인다고 했다. 영운靈雲의 후손들은 서울에, 또 이곳은 오현중 전 교장 고영천高永千이 유업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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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필 2020-08-14 21:20:10
선대의 가르침을 모르고 살았던 저의 간교함, 그 행위를 정의롭게 바꾸어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사료를 본 사관의 사의라 생각, 이제는 알았으니 역사를 반듯하게 하는 무영도사가 된다. "꺾을 때는 확실하게, 벨 때는 소리가 강하게.", 의는 사람은 베지 말되 돌대가리는 과감히 매질하겠단 음이다. 이것이 나의 권리이며 국민의 알권리이다.

소원성취 2020-08-14 09:38:06
전 세계적 지구 온난화가 지속되며 태풍으로 피해 받는 모든 인류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손지 2020-08-14 09:06:39
하라버지 지금 세대는 영행정행 핸드폰을 하영들 썸수다.
긴디, 이게예 잘도 해로웁디다.
오래 해져가난 손이 또시고 예.
눈도 또똣해졍 신경이 상승허고예,
빛이 동공을 고정시켜 줌과 동시에예,
어큐트하게 찌릿찌릿허면서예,
잘도 발전 핸예,
나만 알앙 될게 아닌디 나만 알아졈수다.
포는 사람들이 이거 인체에 맞게 쓰랜 고라줘도 나이 먹어부난 맞췅 쓰기가 어렵수다.
어떠엉 하믄 좋을지 인지하고 잘 활용 허랜 훈계를 베풀어 주십서예,
알게찌양?

靈令公 2020-08-14 08:44:11
2020년 8월 14일
濟州道 三十七大家。
靈令大王 萬世 萬世 萬世。
高無。

버스안내양 2020-08-14 07:24:05
한국의 살았는 역사!
버스 안내양 월 : 버스 출발합니다, "아저씨! ~ ㅁㅁ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