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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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골목 안 다섯 가호가 한 세상이었다. 우리 집은 고샅에서 들어서며 한 번 꺾여야 닿게 긴 골목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예닐곱 이웃 아이들에게 골목은 들고나는 길 넘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일상의 무대였다. 자치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땅 뺏기, 구슬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곳. 바람 좋은 날엔 연을 띄워 하늘 너머 세상을 꿈꾸며 가슴 설레기도 했다.

아이에게 골목은 바깥으로 나가는 첫 출구였다. 희부연 기억 저쪽으로 떠오른다. 잡풀에 섞여 민들레를 처음 본 것도 골목이었다. 마당 모롱이 분꽃, 봉숭아, 금잔화 말고 골목에서 처음 본 꽃은 신기(新奇)했다.

민들레는 맨땅에 옴쳐 몸을 낮게 엎드렸고, 끝물엔 목을 뽑아 샛노란 꽃을 피웠다. 한천(寒天) 아래 피는 꽃은 옹골찼다. 꽃이 지면 허연 갓털이 하늬에 날개를 달아 먼 곳을 지향해 날았다. 그들 붙이의 영역을 확장하리라는 내 상상에도 작은 날개가 달리곤 했다. 작은 꽃의 놀라운 운신을 지켜보며, 그게 한 생으로 완성되는 장엄함에 전율했다.

골목은 단순히 집을 오가는 공간이 아니었다. 미지를 꿈꾸는 실험무대였다. 문법도 개념도 없이 쏟아 내던 말, 악보 없이 흥얼거리던 노래, 하루해가 잠기는 줄도 잊던 놀이가 있었다. 일없는 아이들에게 놀이의 공감만큼 흥겨운 곳이 있으랴.

옛 골목을 찾았더니 집들이 헐리고 터는 밭이 돼 있었다. 그때의 아이들 하나도 어른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어귀에 담을 쌓아 출입을 막아 놓은 걸 보며 무상감을 떨치지 못했다. 흔적이 지워진 지 오랜 골목길을 덮으며 잡풀만 무성하다. 적막해 돌아서는 발길이 천근이다.

읍내에 살며 걷기에 나서면 으레 마을길을 가로질러 공원을 오간다. 연고가 아니라 아직 간극이 있어 낯설다. 한번은 코스가 단조해 마을 안 골목길을 걷기로 했다. 골목이 많아 그것들이 어느 지점에서 사통오달로 이어져 흥미로울 것 같았다.

몇 걸음 떼어 놓다 놀랐다. 변했을 거란 어림짐작이야 했지만 이럴 줄이야. 골목길 이 시멘트로 포장돼 흙 알갱이 하나 안 보인다. 숨이 막혔다. 흙이 없으니 나무는커녕 잡풀 하나 나 있지 않다. 나무와 풀이 없으니 꽃도 열매도 없다.

콘크리트바닥을 타고 다리로 오르는 탱탱한 경직감과 슬래브 건축물로 바뀐 급진적 변화의 이질감에 놀라 자지러질 뻔했다.

골목에 나와 노는 아이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나는 낯선 나그네를 힐끔 쳐다보는 노인네 그림자도 없다. 대문이 없던 섬에 문들이 닫혀 있으니 이도 격세지감이다.

사람이 떠난 듯 사위 적요하다. 산사 아랫마을도 이러진 않을 텐데 이럴 수가. 귤 철이라 다들 과수원에 간 걸까. 그래도 그렇지, 보채는 아기 어르는 등 굽은 노인네 한둘 집에 남아 있을 법도한데….

돌아오는 길. 두 개의 시·공간을 들락거리며 나이도 잊고 감상에 무너져 내린다. 어릴 적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던 옛 골목과 오늘 이곳 골목 사이를 흘러 온 시간의 강은 어디를 흐르고 있을까. 옛 골목은 닫혔다 치고, 아이들이 없는 마을 골목엔 나무도 풀도 꽃도 열매도 없지 않은가.

옥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눈앞으로 느긋이 누워 있는 바다만 여상할 뿐, 몸 으스스한 변화다. 눈이 어느새 서쪽 접경 마을로 간다. 한길 양쪽으로 늘어선 아파트 군락이 흉물스럽다. 요 몇 년 새 주택단지들이 다퉈 들어서며 멋대로 일그러진 지평에 시야가 혼란스럽다. 건축은 시골 마을이 품고 있던 골목이라는 공간의 편안한 질서까지 파괴해 버린다.

집으로 꺾여 들어가던 옛 골목길, 아이들이 꿈꾸던 놀이 공간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그 골목풍경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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