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춘근姜春根:1892(고종29)~1919,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제주시 오라리<오라위> 태생. 강춘근은 중문 지경 법정사法井寺의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온 김연일은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으로 광주감옥소 목포분감分監에서 동년 1월 옥사 순국하였다.


1918년 동 10월 5일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시켜 군대 조직으로 편성한 후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고 박명수를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우대장, 또 양남구梁南球를 중구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으로, 장임호를 모사謀師로 삼았다.


강춘근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기 직전에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1996년 12월 20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강충남康忠南:1926(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사업가, 1926년 표선면 세화리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부인 기해옥金海玉과 슬하 2남을 두었다.


일본에서 50년 동안에 ‘후지’ 富士전선공업을 운영했다. 모범 사업가로 선정된 후 교포사회에서는 흔치 않게 일본 통상대신상通商大臣賞을 수상한 외골수 실업인으로, 제주대학교濟州大學校에 발전기금 10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앞서 명예名譽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아 그의 흉상胸像이 교내에 세워졌다.


강충남은 한 13세에 도일渡日, 19세에 전기수요의 급증에 따른 전선공업이었다.


대판전문학교에 입학해 30대 초반 부사전선공업㈜을 창업한 것은 6·25동란이 끝날 무렵이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1967년 품질관리 우량공장으로서 선정되어 ‘오사카’大阪府 지사상을 수상, 이듬해에는 중소기업장관상을 받았다.


1981년 통상산업대신상을 수상할 때까지 부사전선을 우량기업으로 키워온 그의 기업정신은 신뢰信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또한 표선상고에 거액을 지원하고 표선국교에 전기시설과 도로포장비 등을 지원했다.


1984년 5월에 열린 제13회 전국소년체전에는 대구大邱지구 준비위원장을 맡아 8억 2000만원의 거금을 전달했다.


강충남에게 국무총리, 문교부장관, 체육부장관의 감사장이 주어진 것은 소년체전이 끝난 후의 일이다.


1994년 남북통일보다 어렵다는 오사카 4개 교민僑民단체를 통합, 관서關西제주도민협회의 초대初代회장을 맡기도 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강치명姜治明:1928(일제강점기)~?, 개업의사, 지방공사 제주의료원 원장院長으로 재직하며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북慶北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7월 7일 구좌읍 김녕리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이수한 제주인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9년이었으며 산부인과 전문의專門醫가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서울에서 개업하면서 연구생활을 계속하여 1964년에는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제주도 출신으로서는 두 번째로 의학박사가 되었다.

 

부인 김지영金志映과의 사이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학생생활을 끝내고 1967년에 금의환향錦衣還鄕, 제주시에서 ‘서울산부인과의원’을 개업한 그는 제주도의사회장을 10여년이나 역임하면서 ‘대한기생충박멸협회 제주도지부장’을 맡았다.


1977년 개업의開業醫를 그만두고 제주도립 제주의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1980년에는 대한大韓산부인과학회 부회장을 맡아 학회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1983년 도립병원의 명칭이 바뀌어 지방공사 제주도 제주의료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날로 발전하는 의료기구의 현대화와 만성적인 적자赤字운영을 벗어나기 위한 줄기찬 노력을 계속했다.


▲강치황姜致璜:1549(명종4)~1599(선조32), 무신, 애월읍 상가리<상-더럭> ‘동상-골’에 거주, 1576년(선조9) 형제가 무과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그는 장원壯元으로 급제해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이 되었다.


아우는 남부 주부主簿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용감히 싸워 공훈을 세워 인조 임금으로부터 선무랑宣撫郞을 제수 받고 원종공신 원종공신願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는 영광을 얻었다.


본시 대원강씨大元姜氏로 기록되어 오던 것을 진주晉州로 관향을 바꾸어 진강晉姜 염통악念通岳파에 속한다. 중국 몽고계 귀화인歸化人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큰아들은 강두위이며 둘째 강두현은 안덕면 창천리<창고-내> 신산神山에 유택을 마련 그 후예를 창천倉川강씨, 줄여 창강倉姜이라고 한다.


특히 1592년(선조25)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공훈을 세워 선무원종宣武原從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다.


후손들이 1805년(순조5)에 충훈부忠勳府로부터 공신록권功臣錄券을 받아 복호復戶되었다.

 

   
 

▲강태국康泰國:1904(광무8)~?(분단시대), 기독교 목사, 교육자. 제주도 남제주군 출신, 본관은 신천.


1932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에 고베<神戶>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부터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전남 광주에서, 또 중국·만주 등지에서 목사로 활동한 바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조지아·콜럼비아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박사 학위를, 이듬해 미국 밥존스대학에서 ‘히브리어語와 한국어와의 대조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새문안교회의 목사로 활약, 1952년 세계복음주의선교회 이사장, 1954년 극동문화방송 이사장과 한국성서신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9년 한국성서선교회 이사장으로, 1977년 KCCC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신약단권주석單卷註釋’, ‘성서주해聖書註解’, ‘매일의 묵상’ 전12권, ‘종합복음연구’ 또 번역서로 ‘기도수첩’, ‘설교집’ 전8권 등이 있다.

 

   
 

▲강태석姜泰碩:1938(일제강점기)~1976, 화가. 교육자. 본관은 진주. 서울대학 미대 회화과 3년 중퇴, 제주시 일도동<제주성안>에서 강창무姜昌武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제주에는 많은 화가나 문인들이 피난을 왔다. 화가로는 이중섭李仲燮, 최영림崔榮林, 장이석張利錫, 홍종명洪鐘鳴 등이었다.


당시 강태석은 오현중학교 2학년으로 제주시 ‘칠성-통’ 입구의 한 허름한 집 유리창에 “그림을 무료로 가르쳐 드립니다.”고 쓴 홍종명 화백의 글을 보아 그곳을 찾아 그림 공부를 하였다.


1955년 7월 6일 서울예고 2학년 신분으로 시내 남궁南宮다방에서 개인 미전美展을 개최했고, 검정고시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1961년 군 복무 후 복학한 그는 3학년에 진급하지 않은 채 학교를 그만두었다.


중앙 미술계의 비리非理에 환멸幻滅을 느껴 그 길로 귀향, 제주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어떤 공모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한 곳에 집착하지 못하는 보헤미안적 기질로 인해 생활은 엉망이었다.


1969년 아들을 얻고 한때는 생활인이 되기 위해 수출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림 이외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 생계生計라는 현실 앞에서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의 예술적 광기狂氣를 더욱 발동시켜 방황케 했다.


그 때 이미 폐결핵肺結核으로 심하게 앓고 있었고 술과 비참한 방랑 생활은 그를 더욱더 파멸시켜 갔다.

 

밀양密陽의 한 산사山寺에서 요양을 하면서 건강을 돌보던 때도 있었으나 결국 1976년 강원도 속초束草에서 죽고 말았다.


1997년 9월 여류시인 김순이金順伊에 의해 강태석 화백에 대한 연구와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강화백姜畵伯이 소장해 왔던 작품과 파일 7권은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앞서 ‘방랑의 화가 강태석’이란 책은 김순이金順伊가 1986년부터 10여 년이 넘게 조사하고 수집 정리한 귀중한 자료를 묶어 간행한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의 화풍畵風은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주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앞으로 강화백姜畵伯의 화풍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