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병들 경험도 쌓을 겸 몇 명씩 총살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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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마을 덮쳐 590여 채 가옥 방화…모든 주민 북촌초 운동장 집결 명령
기관총으로 443명 무자비하게 학살…4·3 당시 인명피해 최대 단일 사건
▲ 1948년 1월 17일 북촌마을 학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너븐숭이4·3기념관 내에 내걸린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그림(강요배 작)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부터 고완순 북촌리노인회장(79·여), 이승찬 4·3희생자북촌유족회장(73), 이재후 전 유족회장(78).

1948년 6월 우도에서 출발, 제주항으로 가던 배가 풍랑으로 조천읍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경찰 가족 13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포구에 접근하자 무장대가 경찰 2명을 죽였다.

1948년 12월 냉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낸시빌레’에선 북촌리 청년 24명이 총선거 불참을 이유로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48년 4·3사건 발발 후 북촌마을은 긴장감이 고조됐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구좌 세화리 주둔 2연대 3대대(대대장 정준철 소령) 중대 병력 일부가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졌다.

마을에서 군인이 사망하자 당황한 원로들은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주둔부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해 모두 총살해 버렸다.

대학살의 전주곡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쯤. 2개 소대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숨어있을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590여 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모든 주민은 북촌초등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 집단 학살 현장인 당팟에서 발견된 탄피들.

학교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세 방향에서 겨냥해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다.

군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았다. 이 방법이 잘 통하지 않자 군 지휘관은 보초를 잘못섰다며 민보단 부단장 장윤관을 불러내 권총으로 가장 먼저 사살했다.

당시 9살이던 이재후씨(78)는 현장에 있었다. “긴 대나무로 운동장을 동·서로 나눴지. 서쪽 편에 군경가족 20여 명이 모여 있어서 주민 모두가 살려고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지. 군인들이 무지막지하게 때리며 주민들을 다시 갈라놨어. 어머니 치마폭에 숨어서 지켜봤지…아버지와 누나, 큰아버지, 사촌형제 등 일가 5명이 죽임을 당했어.”

당시 10살이던 고완순씨(79·여)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타타타…총을 난사하더니 사람들이 쓰러졌지. 남동생과 개미처럼 운동장을 기어 다니다가 한 엄마가 아기를 안은 채 죽어있었어. 3살 난 남자아기가 젖을 찾는지 죽은 엄마의 저고리 품으로 파고드는 거야. 너무 떨려서 눈물도 나오지 않더라고….”

대대장 차량 운전병(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학교 울타리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려했다.

그런데 한 장교가 이런 제한을 했다. “입대한 후에도 적을 사살하지 못한 사병들이 있다. 경험도 쌓을 겸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시키자.” 이 학살 방법이 채택됐다.

주민들은 30명씩 나눠 동쪽의 당팟(밭)과 오목하게 쏙 들어간 옴팡밭, 서쪽의 들녘인 너븐숭이(넓은 쉼터의 제주어)로 끌려갔다.

고완순씨의 기억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쳤지. 어머니와 남동생, 나는 옴팡밭으로 끌려갔어. 철커덕 철커덕 장전하는 쇳소리가 났어. 시커멓게 보였던 밭이 햇빛이 비출 때마다 온통 핏빛으로 윤기가 났어. 그 때 ‘사격 중지’ 소리가 들렸고 살아남게 됐어…한 군인은 ‘간나 새끼들이 파리보다 목숨이 더 길어’라며 욕을 하더군.”

 

 

▲ 북촌 너븐숭이 위령성지에 있는 순이삼촌 비석. 피를 상징하는 붉은 화산송에 눕혀진 비석들은 당시 쓰러진 희생자를 상징한다.

학살 현장은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처럼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극은 겨울 해가 넘어가던 오후 4시쯤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고씨는 “잿더미가 된 마을은 어둠이 깔린 저녁에도 열기가 남아 있었어. 대대장이 불에 타지 않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함덕 피난소로 오라고 명령했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음날 산으로 피신하거나 또는 피난소로 가는 양자택일을 했다.

대대장의 명령대로 함덕 피난소로 간 100여 명 중 25명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함덕 서우봉 인근 모래밭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이승찬 4·3희생자북촌유족회장(73)은 “4살이던 나는 누나와 형에게 맡겨졌어. 어머니는 2살 난 여동생을 데리고 함덕 피난소로 갔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지.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금도 행방불명인 명단에 올라있어.”

1949년 4월.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에 돌아와 성을 쌓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갔다.

한날 한시에 남녀노소 443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북촌주민 학살은 4·3당시 단일 사건으론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마을(里) 단위로도 최대 피해 마을로 기록됐다.

북촌마을은 후손이 끊긴 집안이 많아서 한 때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렸다.

죽은 자가 워낙 많아서 시신은 아녀자들에 의해 학살 현장 주변에 가매장됐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 안장됐다.

온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연고가 없는 시신은 오래도록 방치된 후 야산에 묻혔다.

 

 

▲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시신에 돌무더기로 덮어 가매장하면서 ‘애기무덤’으로 남게 됐다

엄마 품에서 함께 죽어간 어린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10여 명을 수습,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 돌무덤은 ‘애기무덤’으로 남게 됐다.

이재후씨는 “어른들도 안장 못했는데 아이들은 어떻겠어. 너븐숭이에다 돌무더기로 무덤을 만들었지.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온 4월에 이번엔 홍역이 창궐했어. 약도 없었던 시절, 어린 아이들이 또 다시 죽어 나갔지.”

온 마을이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이면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북촌마을에서 자행된 집단학살을 모티브로 소설이 나왔다. 제주4·3사건을 문학작품으로 세상에 처음 알린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년 작)이다.

시대의 금기를 깬 그는 공안당국에 의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소설은 제삿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엄청난 피해를 당했음에도 주민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던 암울한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화해와 상생이 싹트던 2009년. 북촌마을에는 너븐숭이4·3기념관과 위령성지가 들어섰다.

기념관에는 강요배의 4·3그림 ‘젖먹이’, 박재동의 만화, 총살 현장인 당팟에서 나온 탄피 등을 전시해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검은 돌에 새겨진 443명의 희생자 명단 앞에는 매일 촛불을 켜놓고 있다. 이 촛불은 영혼들의 눈물과 피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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