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다.

눈이 펄펄 내리는 밤. 바람도 없어 직선으로 눈은 떨어지고.

중력에 맞서 천천히 내리는 눈은 몽환적이다.

그러한 눈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처마 끝에는 호롱불이 켜져있다. 부럽게도 시인은 그런 눈을 맞이한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내리는 눈이 곧 먼 곳의 여인이 옷 벗는 소리다.

시인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

솜털만큼 가벼운 눈이 지면에 닿을 때의 그 마찰음을 평범한 사람들이야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은 좋겠다.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을 때 ‘저 멀리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답하면 되니까.

6백만불의 사나이나 소머즈처럼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바로 담 너머 옷 벗는 소리도 못 듣고 보지도 못 하는데 말이다.

▲제주지역에 눈이 펑펑 내렸다.

지난 11일 아침 제주는 하얀색으로 덮였다.

한라산에는 40㎝의 눈이 쌓여 입산이 통제됐고, 제주국제공항 활주로도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1100도로나 산록도로 등은 차량이 통제됐다.

제주시지역 주요 도로가 얼어붙어 차량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출근길이 혼잡스러웠다.

제주시 오라동에서는 시내버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승객 15명이 부상을 입는 등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잇따랐다.

▲아쉽게도 제주지역에서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기 힘들다.

바람이 거칠어 눈발이 세게 날린다. 귓가를 때리는 눈바람에 허둥지둥 헤매기 일쑤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폭설과 강풍 때문에 바닷길이나 하늘길이 막힌다.

이뿐만 아니라 눈이 그치면 흙탕물이 돼 질척거리면서 불쾌감을 준다.

이게 현실이다.

그래도 가끔 시인이 되어 먼 곳에 있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