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길지로다. 이곳에 안주하면 갑부나 유명한 선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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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강씨 시조-강위종, 순국열사 위해 환국사업에 크게 공헌…조선신보 사장 역임
강위황, 조선 학생 전위동맹 활동강유석, 신식 개화 반대 민란 주도
▲ 창천 강씨 시조인 강위빙이 설촌한 것으로 알려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의 명소인 창고천의 모습.

▲강원화康元化:1912(일제강점기)~?, 서귀포 야학의 항일활동. 본관은 신천, 서귀읍 법환리 태생. 송순혁, 송달오宋達五(27, 서귀)와 함께 동지들과 유·무신론有無神論 논쟁을 제기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말을 하였다.


1937년 6월 4일 각기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앞서 이 일로 전남경찰부 노경부盧警部의 지시로 제주경찰서에서는 1935년 8월 18일 서귀포를 중심으로 하여 송순혁 외 40여 명을 검거, 송순혁, 송달오宋達五(27·서귀), 강원화康元化(25·법환), 변성현邊聖現(22·법환) 등 4명만을 기소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1930년 오사카시에서 <중학강의록>를 구독한 후 고무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동년 7월경 병으로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2년 1월부터 홍순성洪淳性(22·일도), 윤태석尹太錫(22·서귀), 강봉주康奉周(27) 등에게 마르크스주의 화폐론 등 사회과학 서적을 읽도록 하여 신년 소감문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강성문康性文, 양원득梁元得(20·법환) 양인 수십 명에게 한국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5년 3월 양원득의 집에서 야학소 생도 강정생康貞生 외 24명에게, 부자는 보통학교로 가서 배우고 너희들은 가난하니 야학소에 다니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일제에 대하여 계급적 저항 의식을 강조하였다.


이에 관여된 사람으로서 강봉주康奉周(27)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기소 중지가 되고 이도백李道伯(26·잡화상·서귀포), 홍순성洪淳性(22·양화업·일도), 윤태석尹太錫(22·어물상·서귀포), 강윤직康允直(20·농업·법환), 강범준康範俊(19·농업·법환), 이기옥李己玉(27·의업·서귀포), 양원득梁源得(20·농업·법환), 양봉춘梁奉春(18·농업·법환), 김춘지金春志(25·무직·하예), 강남옥康南玉(17·농업·법환) 등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강위빙姜渭聘:1643(인조21)~?, 선비. 창천 마을의 설촌자.


본관은 진주. 대정읍 상모리<모실-개> 강계진姜系晋의 장남이다.


1688년(숙종14) 대정현의 향장으로서 대정향교와 재사齋舍의 공사 도감이 되어 이를 완성하였다.


앞서 1675년(숙종2) 봄에 그가 대정현의 좌수로 있을 때 새로 부임한 제주목사 소두산蘇斗山이 대정현 성안에 들러 말하기를 “순력차 창고천 머리에 이르고 보니 ‘현재의 창천초등학교 북쪽을 가리키며’ 참으로 좋은 길지이다.


이곳에 안주하면 갑부가 되거나 유명한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강위빙은 이곳(현 창천리 160번지)으로 옮겨 영주한 것이 설촌의 유래이다.


또 ‘창강倉姜:창천 강씨’의 시조가 되고 처음 마을 이름도 창고천(창곳내)이라고 명명되어 내려오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창천리로 개칭하였다.


목사 소두산(1627~1693)은 풍수지리가로서 제주 사람 고홍진高弘進(오도롱 마을)과 함께 어울려 도내 각처를 순방하였다.


도내의 각 취락이나 묘지에 대해 소 목사의 전설적인 일화가 꽤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 “강위빙이 감옷(갈옷)으로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 있다.


대정현 감산리에 심내복沈來復이 유배를 왔었는데 이 마을의 강익주姜翊周 부자와 갈등이 있었다.

 

심내복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강익주를 반역죄로 고발하여 상경, 또 이에 관련된 강위빙도 1763년(영조39) 연행되었다.


조사관은 강위빙이 입고 간 감옷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물으니 “이 옷은 제주 농부의 작업복인데 마침 밭일을 하던 중 갑자기 왕명을 받아 올라오게 되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강위종姜渭鍾:1909(융희3)~?(분단시대), 순국열사 유해 환국사업가. 안덕면 창천리<창고-내> 강규빈姜奎彬의 아들이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낭화浪華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명치明治대학 문학부에서 수학, 1945년 해방 후 재일조선문화단체연합회의 산하 언론기관인 조선신보사 사장으로서 일본에서 동포의 권익 옹호 및 조국 재건 활동을 하였다.


1946년 5월 순국열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 이를 위해 홍현기洪賢基, 박근세朴根世 등과 함께 순국殉國열사유골봉안회奉安會를 조직,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禎基 등 3열사의 유해를 봉송하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케 하였다.


앞서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각처에서 전사한 동포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도 서둘렀다.


1950년 이강훈李康勳, 홍현기洪賢基, 이유천李裕天, 박근세朴根世, 김정주金正柱 등과 함께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봉안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일본 후생성에서 한국인 전몰자 명단을 발견하고, 그 유골들을 찾아 그 유족에게 이를 알려 911주柱의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하였다.


유족을 찾지 못한 700주는 동경 유천사裕天寺에 봉안하였다가 한국정부에 인계하였다.


1975년 6월 19일 외무부와 보건사회부의 추천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다.


또 일본에서 한국인문화단체연합회 회장으로서 교포의 권익옹호와 문화 사업에 노력하였다.


1982년 10월 25일 토쿄 축지築地의 본원사本院寺에서 엄수된 일제하 한국인전몰자 위령제를 거행, 이는 일본이 교과서 왜곡歪曲사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반성하지 않자 일본으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한 것이다.


1983년 12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韓日 불교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는데 한국인 전몰자 유해 봉환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기 위한 조치였다.

 

▲강위황姜渭璜:1914(일제강점기)~1955, 서울 고학당苦學堂에서의 항일 활동. 가명은 강윤옥姜潤玉, 본관은 진주, 강권로姜權老의 장남으로 중문면 하예리<열리>에서 태어났다.


학생 동지와 함께 항일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2년 3월 체포되었다.

 

1939년 9월 19일 경성지법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미결 기간 옥고를 치렀다.


앞서 김기범(20·삼도)과 강창거(21·용담)도 함께 유죄 선고를 받았다.


1927년 3월 향리의 개량 서당 진성의숙進成義塾 4년을 졸업하고 1930년 9월 서울로 올라가 사립 숭인崇仁학교의 부설 고학당(1931년 7월:폐쇄) 2학년에 편입, ‘자본주의 구조’·‘유물사관 대의’·‘플로테리아 경제학’ 등을 탐독, 1931년 5월 20일 조선 학생 전위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동맹의 강령은 레닌주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교육에 반대하고 노동자·농민의 조직자 양성을 기한다.


조선 학생의 당면 문제를 과학적으로 자주적 결정과 동시에 공고한 조직을 기한다고 설정했다.


또 행동 지침에서 몇 가지를 고른다면 학생의 언론·집회·출판의 자유, 한·일韓日 학생간의 민족적 차별 철폐, 교내 학생회의 자치권 확보, 조선인의 교육 기관은 조선 학생의 본위로 주장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강유석姜瑜奭:1841(헌종7)~1904(광무8), 고종 때 민란의 장두狀頭, 본관은 진주, 제주시 오등리<오드싱>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절친한 송계홍宋啓弘(오라:1840~1896)과 함께 수구적인 유생이었다.

 

1896년(건양1) 3월에 강유석은 송계홍과 함께 신식 개화를 반대하는 민란을 일으켜 제주경무청警務廳을 파괴하였다. 


앞서 조정에서는 1894년(고종31) 갑오경장으로 개화정책을 단행하고 또 단발령斷髮令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마침 강유석은 도망쳐 숨어버려 죽음을 면했다. 이 일로 제주관찰사觀察使 오경림吳慶林은 책임을 져 면직되었다.


이는 동지 이연보李淵寶가 개화 정책에 반대 운동을 펼쳐 경무청에 수감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강유석, 송계홍이 격분한 민중들을 이끌어 경무청을 공격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전 여산부사礪山府使 김윤병金潤柄(조천)과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한림)은 관군을 인솔하여 민란을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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