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달항아리 등 작품 세계 유명 미술관에
극사실주의 회화를 개척…최고봉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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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화가-“돌은 하찮은 것 아니라 인류문명 일으킨 존재다”
▲ 고영훈 화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 개인화실에서 달항아리 그림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그는 “우주를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달항아리”라고 말했다.

“작은 돌에도 생명이 있고 아름다움이 깃들어있죠. 돌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억겁의 시간동안 인류문명을 일으켜 세운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극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하고 최고봉에 오른 고영훈 화가(65).

 

1974년 홍익대 3학년 때 그린 ‘이것은 돌입니다(This is a Stone)’는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1.9×4m에 달하는 캔버스에 거대한 돌 하나를 그린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팡전에서 공론화가 됐다. 그는 극사실 회화라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선두에 서게 됐다.

 

1970년대 화단의 주류는 주제뿐만 아니라 내용·색채·선·형태를 거부한 추상화가 대세였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그림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1970년대 초 청년문화운동이 일었죠.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고, 군부에 대한 저항으로 고래사냥 노래가 유행했죠. 당시 20대 젊은이들이 문화를 주도했죠.”

 

1990년대까지 25년간 천작한 돌 시리즈는 전 세계가 주목했다.

 

그는 서른다섯이던 1986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화가로는 처음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 경매시장의 양대 산맥인 뉴욕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거래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작품가격은 100호(준대형 그림) 당 1억2000만원이다. 국내에서 그림 값이 가장 높은 화가로 뽑히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고, 생성과 변화, 소멸을 하죠. 자그마한 돌도 존재의 극한점을 파고들면 거대한 한라산을 닮았고, 우주를 담고 있고 있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제주시 건입동 제주동초등학교 인근 마을에서 출생한 그는 7살 때 붓을 들 정도로 미술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태평양전쟁 당시 부친은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되는 등 가족사는 평탄하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어릴 적부터 인분을 지게에 메고 밭에 뿌리는 등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바다는 그의 놀이터였고, 한라산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했던 ‘큰 바위 얼굴’이었다.

 

“가난했고, 고생을 했기에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죠. 잘살고 편안히 지냈으면 깊이 있는 작품소재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거 제주사람 모두가 궁핍했지만 바다와 한라산, 거친 돌이 있었기에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부여해 줬죠.”

 

그는 돌 시리즈에 이어 항아리와 그릇에 주목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곡식을 담았던 달항아리의 가장 선명한 모습부터 뿌옇게 사라져가는 장면을 단계적이며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생성과 소멸의 궤적을 쫓은 것이다. 특히 달항아리 하나를 섬세하고 밀도 있게 그린 ‘시간을 삼킨 달’은 켜켜이 묻은 시간의 흔적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그의 작품은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 소장됐다. 유럽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해외활동을 접었다.

 

“외국을 다니다보니 어느 시점에 내가 서양인들에게 숙제를 받는 느낌이 들었죠. 해외 스케줄을 접고 모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죠.”

 

고 화가는 “앞으로 좋은 그림, 욕먹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싶다”며 “후대에 남길 마지막 명작을 그려서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화가로 남고 싶다”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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