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기러기 양 날개 펴고 유유히…그 언덕배기가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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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지 원묘-고이지, 한성부 판윤 고득종 4세손·오위도 총관 고한걸 아들
봉개리 설화 ‘고장연과 악생이’ 주인공…숙부 제주양씨와 나란히 놓인 쌍묘
▲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 열안지 오름에 있는 통훈대부 고이지 묘역 전경. 대형 산담 안에 동자석·무인석 등이 오석의 윤기를 띠며 서있다.

▲명도암 열안지 오름


한 사람의 일생에서 남는 것이 있다면 이름과 무덤이다.


무덤 앞 비석에 이름 석 자와 간략한 생애를 적은 것이 전부다.


그 누구도 자신이 오래 살기를 바라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생각만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생에서 끝없이 부귀영화와 명예를 추구한다.


아마 현세를 위해서 일 것이다. 현세에서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얻는 것 또한 많다.


인간 삶이란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 번 뿐인 생에 노예로 태어날 자 누가 있으며, 어렵게 살 자 또 누가 있으랴.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망을 가지고 있고, 욕심을 부려서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가 없고, 구하여서 제한과 절도가 없으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싸우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 된다.”


순자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가 이러했다.


그러나 어떤 명성과 부귀도 자신이 현실에 살아있을 때만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부귀영화가 자기의 것이라 해도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이다.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인간은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죽음을 보는 눈은 삶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북망산천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고이지(高以智)의 묘는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에 있다.


열안지 오름은 제주 옛 지도에 여난지(呂難止), 여난지(如卵旨), 열난지(列蘭址)라고 기록돼 있고, 세간에서는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날아가는 형국이라는 말도 있다.


한자 표기가 음가 차용 표기이기 때문에 한자 해석보다는 고유 지명의 표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발 328.7m 열안지 오름은 명도암에서 보면 그지없이 안락하고 부드러운 능선의 낮은 언덕이다.


그러나 반대로 봉개리에서 보면, 마치 기러기가 양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는 모양의 산세가 선명하다.


열안지 오름 낮은 언덕배기에 남향으로 햇살을 받으며 고즈넉하게 앉은 그의 묘지는 얄궂은 바람을 피해 갈 수 있는 포근한 곳이다.


맞은편 안샘이 오름 능선으로 명도암 김진용 선생의 유허지가 보인다. 


▲고이지 묘역의 원묘


고이지의 구비(舊碑)에 의하면 본관은 제주이며 명종 11년(1556)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련현감(長連縣監)과 태안현감(泰安縣監) 겸 절제사를 역임했다.   


고이지는 한성부 판윤 영곡공(靈谷公) 고득종(高得宗)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오위도 총관을 지낸 고한걸(高漢傑)이다.


고한걸과 남평문씨 사이에 5남 1녀 중 4남이다.


고이지는 숙부인(淑夫人) 양씨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고이지는 김진용의 처 할아버지가 된다. 고이지는 설화에서는 고장연(高長連)로 불린다. 장련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와 관계된 설화는 봉개리에 ‘고장연과 악생이’라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이지가 장련 현감 3년을 지낸 후 하인을 데리고 제주에 오는데 폭풍 때문에 배를 놓을 수가 없었다.


약 일주일 동안 풍랑 자기를 기다리는데 포구에 보따리가 있어 그 보따리를 가지고 배를 타니까 바람이 자서 배를 띄울 수가 있었다.


배가 수평선에 이르자 제주의 집에서는 고장연의 각씨가 미쳐 날뛰고 있었고 집에 이르자 각씨는 미쳐서 집을 나가버렸다.


이에 고장연은 하인을 시켜 각씨를 찾다 보니 정의 하논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 것을 잡아왔다.


심방을 시켜 굿을 할 때 고장연은 양반이어서 춤을 출 수 없다 하여 하인인 악생이와 백질이를 시켜 춤을 추게 하니 각씨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열안지 오름 인근에 고장연터와 도욕남밧당이 이 설화와 관계가 있다.

 

▲ 고이지 무덤의 화강석 비석. 가첨석에는 방부하엽 형태의 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육지에서 가져온 화강석 비석과 문인석 


고이지의 묘역에는 통훈대부병마수군절제사 겸 장련·태안현감 고이지와 숙부인 제주양씨(通訓大夫 兵馬水軍節制使 泰安·長連縣監 高以智 淑夫人 濟州梁氏)와 함께 모셔진 원묘로 된 쌍분이 있다.


공의 봉분은 직경이 5m, 높이가 1.2m이다.


그의 곁에는 숙부인(淑夫人) 양씨(梁氏)의 묘가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누워 있다.


고이지의 생몰(生沒) 연대(年代)는 미상이고, 선조 17년(1584) 태안현감(泰安縣監)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묘지로 추정된다.


구비(舊碑)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가첨석에 꽃을 새겼다.

 

그 비석의 글자는 풍상에 마모되어 보이지 않고, 문양은 정확하게 어떤 꽃의 문양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방부하엽(方扶荷葉) 형태로 생각된다.


방부하엽(方扶荷葉) 형이란 연꽃과 연잎을 어울려 만든 아름다운 화문(花紋)이다.


대개 방부하엽 형은 육지에서 벼슬아치의 묘비에 새겨 넣었고, 감목관 김진혁의 묘비에 조면암으로 새겨 비석을 만들었다. 


화강석 구비(舊碑) 옆으로 16세기에 만들어진 육지 화강석으로 만든 문인석 2기가 좌우 서로 보며 마주 서 있다.


화강석 문인석은 아마도 육지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하다.


사망 연대를 알 수 없어 어떻게 제주에 운반했는지는 모르지만 육지의 전형적인 양반 무덤의 석인상이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상이다. 제주가 유독 복두공복 상이 많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육지식 금관조복상은 제주에 그리 흔치 않다.

 

경주 김씨 입도 4세 김보 무덤, 양천허씨 무덤, 제주 고씨 집안 등 주로 지에서 벼슬을 했던 선비들 무덤에 보인다.


고이지 무덤은 원래 석물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으나 동자석은 오래전에 도굴된 듯하다.


또 광무(光武) 연간에 만든 조면암 비석은 제주인 선비 이응호(李膺鎬, 1871~1950)가 썼다.


이응호는 면암 최익현의 제자 이기온의 아들로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했던 지사다.


또 고이지 묘역은 다른 입도조 무덤처럼 새로 세운 동자석 2기, 무인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1기, 귀부이수(龜趺螭首) 1기, 상석 1기가 오석의 검은 윤기를 띠며 서 있다.


산담은 후세가 세웠으나 규모로 보아 제주지역에서 가장 넓고 긴 산담 중 하나에 해당한다.


산담의 길이는 가로 33.8m, 세로 36m나 되는 대형 산담이다.


산담은 평균 넓이는 2.7m~2.9m 정도가 된다. 산담 높이는 전면 바깥이 1m, 후면 바깥이 40cm. 신문은 트지 않았고, 산담은 겹담에 잡석 채움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고이지 묘역의 특징을 보면 ①후세에 축조하여 신문(올레)이 없다. ②문인석과 비석은 화강석이다. ③원묘이기 때문에 지절이 없고 토신단이 없다. ④산담에 어귓돌이 없다. ⑤무덤의 위치가 다른 무덤(남우여좌)과는 반대(남좌여우)로 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 비석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것이 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위해서 묘비명을 쓰고 훌륭한 조상을 오래 기리기 위해 단단한 돌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영원을 갈구하는 ‘기념비적 인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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