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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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11월은 계절의 교차로에 나앉는 달. 단풍이 퇴락하면서 매양 입동으로 소설로 흐른다.

이맘때면 정원의 나무들이 적나라해지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푸름과 무채색이 확연해지고 상록수와 낙엽수, 이분법의 논리가 명료해진다.

늘 푸른 나무들은 계절의 추이에 무신경한 듯 태연자약하다. 하지만 잎 지는 나무들은 낙엽이 거지반 진행돼 남은 거라곤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거무튀튀한 무채색이다. 푸른 옷을 벗어 던진 것은 우연만 한 게 아닌, 지독한 변신이다. 겨울을 목전에 두고 삭풍 앞에 옷가지를 벗는 것이야말로 모험에 다름 아닌, 맹렬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당초에 밀식하면서 나무 사이에 간극을 내지 않아 작은 정원에 포만감이 들었는데, 이 나무 저 나무 눈앞에 줄 세워 놓고 헤집어 보니 상록수와 낙엽수의 구성비가 엇비슷하다. 낙엽 뒤의 정원은 푸름과 무채색이 뒤섞여야 계절의 흐름을 풍경으로나마 담아내리라 한 구상이 구체화했다. 괜찮은 배합 같다.

하지만 이맘때 나무가 현저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래도 상록수다. 슬금슬금 아닌 듯 잎갈이 하면서도 푸름을 놓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한 근기론 안되는 일일 테다. 티 하나만 묻어도 흠이 될, 쨍하게 높푸른 벽공 아래 초록처럼 희망적인 빛깔은 없다.

갈바람 뒤로 삭풍 거세게 몰아치는 한겨울에 여름의 훈기를 되새기게 하는 게 초록, 언제 봐도 상록수엔 겨울을 훈훈하게 지피는 구들장만 한 체온이 깃들어 있다.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 준 초록이 겨울에는 따듯하니, 실한 일이다.

빛깔은 외양(外樣)일 뿐이다. 농담(濃淡)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표면의 색상에 더하지 않다. 겉은 요지부동이나 우리가 모르는 나무의 속은 혼란스러울 것이고, 마음도 종잡지 못해 허덕대고 있을는지 모른다. 연민의 눈길을 보내면 이따금 헐벗은 몸뚱어리 그 속이 먼빛으로 들여다보이곤 한다.

낙엽이 나무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은 것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 온 안일과 나태에서 벗어나려 이내 자신을 담금질하게 했을 게 틀림없다. 그들은 언제든 들이닥칠 한풍과 폭설이 생존을 위협할 것을 오랜 경험칙이 일깨워 알리라.

초록이 떠나가 버린 낙엽수에 11월은 길고 먼 고통을 예고하는 달이기도 하다. 남루마저 벗고 가을 너머 춥고 음습한 겨울의 터널 속으로 오슬오슬 떠는 몸을 놓아야 한다. 더욱이 낙엽수에 겨울은 연년이 겪는 고난의 계절이다. 그러나 한 발짝씩 봄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기다림의 한철이기도 하느니.

겨울 속에 봄을 꿈꿀 수 있어 나무의 생존은 치열하고 그만큼 엄연하다.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다. 사철을 두고 보지만 겨울 속으로 들어설 때 나무는 가장 역동적이다. 11월의 나무들은 살아있음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흔들기 시작할 것이다. 단순한 몸짓이 아니다. 흔들림은 그들의 생리이면서 실존의 엄중한 존재 방식이다.

다가선 지 한참 됐더니, 침잠에 들었던 걸까. 내가 어느새 11월의 나무가 된 양하다. 마치 정원 모롱이에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는 것 같다. 웬 오한기가 엄습해 오면서 몸 오싹하다. 옷가지 하날 더 얹었는데도 추위가 가시질 않는다. ‘옳거니, 이건 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이야. 마음이 추우면 영혼도 추울 것인데,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은 시점인 걸. 어찌하면 좋은가.’

아무래도 한통속, 늘 그렇게 어우러지면 된다고 언약해 온 우리다. 추위를 녹이는 건 한 움큼의 훈김이다. 나무들아, 나는 너희에게, 너희는 내게 따뜻한 눈길 주고받으며 이 한철 함께 건너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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