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9혁명 후 제주도양민학살 국회진상조사단 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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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 표해록-강연공, 진상 감귤 수송 중 일본 표류…도주 원순정이 구호
강영, 홍건적 격주 등 큰 공…제주 유배로 ‘신천강씨 입도조’
정치가 강영술, 도의원·의장 등 역임해 4·3사건 수습 앞장
▲ 4·3으로 인해 폐동이 된 영남마을의 모습. 서귀포시 강정동에 속한 영남마을은 서귀포시 일대에서 가장 고지에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은 4·3사건 당시 20여 가호, 주민 100여 명이 살고 있었으나 무차별 초토화 토벌로 인해 7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강연공姜衍恭:일본에 표류되었던 제주인, 1539년(중종 34) 10월 강연공 등 19명이 진상하는 감귤을 수송하기 위해 출항하였다가 일본日本으로 표류하였다.


5일째 되는 날 밤에 오도五+島 근처에 이르러 배가 파손되어 바위에 의지하여 겨우 살아났고 마침 다음날 고깃배 4척에 의해 구조되어 원순정源純定 도주島主에 의해 구호를 받았다.


1540년 7월 큰 배를 이용하여 일본인 25명이 강연공姜衍恭 등 19명을 호송하여 제주 조천포로 입항하였다.


일본 표류자들이 흔히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오던 일과는 달랐는데 그 까닭을 원순정源純定이 대마도 도주와 알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을 왜인倭人들에게 알릴 우려 때문에 호송 왜인과 강연공 등을 서울로 올려 보내 조사를 하였지만 결국 일본 호송인護送人들은 제주에서 직접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중종실록 35년 9월 18일에 실려 있다.


※중종 35년(1540년) 9월 18일(병오) “소속을 알 수 없는 배 1척이 동쪽 큰 바다로부터 제주를 향하여 왔으므로 왜구로 의심하여 즉각 제주진의 수군과 육군을 정비하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자세히 물었는데 곧 1539년(기해년) 감귤을 진상하러 갔던 강연공姜衍恭 등 40여 명이었습니다. 강연공 등이 작년(기해년) 10월 감귤을 진상하는 일을 맡아 바다로 나갔는데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밤낮 바다에만 떠 있다가 제5일째 밤중에 오도五島 근처에 있는 간자라섬干自羅島에 이르렀을 때 배가 파손되어 암초에 의지하여 겨우 살아났습니다. 배 4척이 왔는데 그들이 표류한 사유를 묻고 옷을 벗겨 마른 옷을 입혀주었고 도주島主 원순정源純定 앞에 들어가서 알렸습니다. 도주는 우리 19명의 개인 신상들을 묻고 나서 각 마을과 각 섬과 각 절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고 4개월을 먹여주었습니다. 올해(1504년) 7월 큰 배를 정비하고 차정관差正官 왜인 인자문引自門 등 7명·벗하여 같이 가는 사람 산시려山時慮 등 3명·곁에서 배를 젓는 군인 이라벽오伊羅碧五 등 15명과 우리들 19명을 함께 배에 태우고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를 호송하여 온 왜인들이 대마도 왜인들과 알력이 있어서 만약 제포薺浦 근처에 도착하여 정박하면 제포에 머물고 있는 왜인들을 만나게 될까 봐서 경상도慶尙道의 포구에 정박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동서를 분간할 수 없었고 바다 위에 떠 흘러갔습니다. 7월 29일 구름이 걷히고 맑아지다 멀리 한라산漢拏山이 보였고 조천관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문 등이 말하기를 “데리고 온 왜인들과 표류한 사람들을 속히 서울로 올라오게 한 뒤에 가히 자세히 캐묻도록 하라. 이 일을 급히 제주목에 회보하도록 일을 예조에 알리도록 하라.” <중종실록, 옛 제주인의 표해록(김봉옥·김지홍, 2001)>

 

▲ 조천읍 소재 대봉림동산에서 발견된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 강영의 무덤. <김유정의 산담기행>

▲강영康永:1352(공민왕1)~1413(태종13), 고려 후기의 공신. 조선조 초기 제주에 온 유배인. 본관은 신천. 할아버지는 대호군 강서康庶,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강윤휘康允暉이다.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경성京城을 점령하였을 때, 호군으로서 1362년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 수복경성 일등공신에 서훈됐다.


1359년 홍건적 침입 때 전 상호군으로서 적을 격주擊走한 공으로 1363년 11월에 기해격주홍적己亥擊走紅賊 2등 공신으로 서훈, 일설에는 본시 황해도 곡산 사람이며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종자從子이다.


신덕왕후의 지친으로 제주 섬에 유배되어 자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1373년 강계만호로서 나하추<納哈出>가 보낸 종자 10여 명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니, 공민왕이 이 소식을 듣고 소환하여 순위부에 감금시켰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연산(지금의 논산論山) 지역을 침범하니, 최영崔瑩, 최공철崔公哲, 박수년朴壽年 등과 더불어 조전원수로서 홍산鴻山에서 싸워 적을 대패시켰다.


1377년 왜구가 강화에 침구하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民, 이원계李元桂 등과 더불어 격퇴시켰으며, 이어 왜구가 영광·장사·해주·평주 등에 침입하자 원수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격주시켰다.


※신천강씨 제주입도조 강영의 무덤은 1929년 김달원 지관에 의해 조천읍 소재 일명 ‘대봉림동산’에서 발견됐다. <김유정의 산담기행·본보 2017년 11월 8일자 보도>

 

▲강영술姜榮述:1890(고종27)~1972, 정치가. 제주도의회 의장.


본관은 진주. 대정읍 동일리<동-날웨> 태생, 자는 자행子行, 호는 남호南湖, 대정향교 직원直員으로 유림의 반수班首이었으며 광복 후 제2대 대정면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제주 4·3 사건 수습에 힘썼다.

1952년 5월 초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자유당 출신으로 당선, 도의원 20명 중 최고 연장자로 임시 의장이 되었고 또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이 되고, 제2대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강영술은 1968년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출판추진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자 이를 완성하였다.

 

제주향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후 1956년 9월 제2대 도의원 선거에 대정읍 선거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김도준金道準 의장이 사퇴하자 동년 5월 새 의장에 당선되었다.


1960년 6월 6일 내도 예정인 제주도 양민학살국회진상조사단에게 협조하기 위하여 6월 4일 도의장으로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비공개회의를 열어 다각도에 걸친 자료수집과 국회조사단에 대한 협조방안 등을 토의하였다.


도의회 제25회 제2차 본회의가 6월 8일 개회되어 4·3으로 인한 양민학살 및 건의문 처리의건에 있어서 시·군단위로 조사한 바 의원들로부터 보고되었다.


제주시를 담당한 고병효高炳孝 의원은 “‘서-비행장’ 집단학살 사건과 보도연맹輔導聯盟에 관련했다”고 해서 집단 학살된 수가 1606명임이 밝혀졌다.

 

북군을 담당한 한재원韓在源 의원은 북촌에서 387명이 당한 것을 비롯해 동복리에서 24명, 조천지서 앞에서 60명, 신흥리에서 10명, 또한 제1차 동복리사건에서 양민학살 85명과 전 부락이 전소, 그리고 행원리 공회당 사건 등을 폭로하였다.

 

북군 서부를 조사한 송봉규宋奉奎 의원은 하귀 국민학교에서의 양민학살 사건 등을 지적한 다음 6·25 후의 소위 예비검속으로 총살당한 희생자들은 양민임에 틀림없음으로 이들의 원혼을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남군 일대의 양민학살 진상을 조사해온 정맹수鄭孟洙 의원은 대정에서의 특공대 사건을 비롯해서 송악산에서 수백명 학살되었다는 것과 안덕에서 187명, 강정에서 30명, 그리고 남원의 산간 부락이 전부 소탕되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또한 토산리와 성산에서 한 번에 30~40명씩 집단학살을 당해서 그 수가 205명에 달했음이 조사되었다고 폭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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