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방언(57)은 일본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지만 전업 뮤지션의 길을 택해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유명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그는 동서양을 막론한 악기 코드를 다양한 음악 장르와 매체에 녹여내고 통합한다.


특히 국경과 이데올로기, 클래식과 대중문화, 전통과 현대 사이, 그 경계를 허무는 음악으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남한과 북한 그 경계에서=그는 1960년 1월 1일 일본 도쿄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어머니는 최북단 신의주 출신이다.


어린 시절 그는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누나 덕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이하며 지냈다.
“어릴 적부터 다섯 남매 모두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요. 피아노는 6살 때 누나의 권유로 처음 치기 시작했죠. 당시 어린 마음에 ‘남자는 밖에서 놀아야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이었죠.”


아버지를 따라 조선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과는 다르며 일본 법률상 무국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계 초·중학교를 졸업했다.


조총련계 중학교 재학 시절 라디오에서 나오던 팝과 록 음악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이 쿵쿵댈 때마다 그의 심장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매일 레코드를 학교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함께 밴드를 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조총련계 학교에서 서양 문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너는 친구들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반동분자’라면서 제 눈앞에서 레코드를 쪼개 버렸죠. 좋아하는 무언가를 이유 없이 빼앗긴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해요.”


그리고 당시 ‘하면 안 된다’는 강압은 오히려 그가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가운을 벗고 피아노 앞으로=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총련계 학교가 아닌 일본 와세다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음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집안 분위기상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아버지는 5남매 모두 자신과 같이 의사가 되길 바랐다. 일본에서 한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떳떳하게 살려면 의사보다 좋은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형제 모두 의사 또는 약사가 됐다.


결국 그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니혼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물론 학창 시절 내내 학업과 음악을 병행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의사 면허를 따고 대학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1년간 일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다.


“제 머릿속에 환자보다 음악에 대한 생각이 더 크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의사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의사와 음악 중 한 가지를 결정하게 됐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졌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경계를 넘어=의사를 그만두고 나서 3-4년 간 그는 주로 건반을 연주하며 다른 음악가의 무대를 도왔다. 그러다가 다른 음악가의 곡을 작곡·편곡하는 등 앨범 제작까지 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20대 후반 그는 이미 밀려드는 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음악가의 곡을 제작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문득 ‘내가 의사까지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음악이 무엇이었지’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의 내면을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자신이 하고 싶은, 또 자신을 위한 음악을 하고 싶던 그는 1996년 1집 앨범 ‘The Gate of Dreams’로 솔로로 데뷔한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가 ‘프런티어(Frontier)’를 작곡하면서부터다.


당시 ‘프런티어’가 울려 퍼지자 선수들은 물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이들 가슴 깊은 벅참을 느꼈다. 서양악기와 우리나라 전통악기의 조화로움, 클래식과 팝적인 요소의 어울림은 경쾌하면서도 신비로웠다.


또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축하 공연에서 ‘아리랑 판타지’를 선사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차기 개최지 공연 음악감독에 이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도 맡았다.


이 외에도 장르에 갇히지 않고 다큐멘터리와 영화, 애니메이션,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결과물을 펼쳐 보이고 있다.


▲나의 고향 제주=그는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에도 제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나서 1998년 한국을 처음 방문하게 됐어요. 그때 첫 목적지가 제주였습니다. 처음 제주 땅을 밟았을 때를 잊을 수 없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적인 힘이 저를 계속해서 잡아당겼죠.”


그와 제주의 강렬한 첫 기억은 곡 ‘프린스 오브 제주(Prince of Jeju)’로 탄생했다.


이어 그는 2013년에 제주해녀를 위한 ‘해녀의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제주도는 제주해녀문화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음악으로 힘을 보탰다.


또 같은 해부터 제주뮤직 페스티벌(제주 판타지) 예술 감독을 맡아 매년 제주의 자연을 무대로 한 주옥같은 무대를 선보이며 제주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제주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고향이 이렇게 좋은 곳이구나’를 느꼈어요. 그때부터 제주를 위한, 제주와 함께하는 음악 축제를 만들고 싶었죠. 앞으로 제주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제주의 매력을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알리고 싶어요.”


재일 제주인 2세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음악가로 성공한 고향 후배를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가능성은 누구나의 눈앞에 평등하게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가능성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생각과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주저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만 지나가 버릴 뿐입니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