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빽유직 무빽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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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논설위원
신분제 사회였던 고려ㆍ조선시대엔 부모나 조상을 잘 둔 덕에 벼슬길에 오르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왕실과 공신, 고위 관료 자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로 등용되는 음서제(蔭敍制)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고려 목종이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관리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지배세력의 지위를 자자손손 계승하려는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5품 관직은 요즘의 군수, 군대 계급으론 대령에 해당된다. 이후 음서제는 고려 귀족들이 문벌을 형성하고 특권을 유지하는 토대가 됐다. 조선시대에도 양반 관료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으로 활용됐다.

▲현대에 들어서도 음서제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현대판 음서제’ 혹은 ‘신 음서제’란 이름으로 말이다. 그만큼 사회 곳곳에서 은밀하게 부와 신분, 특권ㆍ특혜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거다. 때론 공공연하게 이뤄지기도 한다. 소위 ‘빽’으로 작용하는 인사 청탁과 고용 세습이 그 예다.

여기서 ‘빽’은 든든한 배경이나 굵직한 연줄을 뜻하는 일종의 속어다. 백그라운드(Back ground)의 준말이다. ‘뒤를 봐준다’는 의미의 한국식 영어로 광복 후에 만들어졌다,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6ㆍ25 전쟁 때 널리 사용됐다.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쓴 그레고리 헨더슨의 설명이다.

▲‘신의 직장’이라 통하는 강원랜드의 채용 비리가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다. 2012~2013년 신입사원 518명 전원이 유력자들의 ‘빽’으로 부정입사한 게 알려져서다. 직원 채용이 누구 배경이 더 센지를 겨루는 ‘빽 싸움’ 이었다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들어간 친구들 사이에 “난 누구 빽이야, 넌 누구 빽이니”하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듯하다. 이런 복마전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해당 기간 채용 기회도 얻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낙방한 수천명의 지원자를 울리는 단군 이래 최대 청탁 비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사실 이 같은 ‘빽 채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꿈의 직장’이라는 공공부문에 정치인ㆍ고위직 자녀 등의 ‘채용 청탁’이 만연돼 있다는 거다. 이는 한두 해의 일이 아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공공기관들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무너뜨려온 셈이다. 물론 민간기업도 ‘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빽’없는 ‘흙수저’ 청년 구직자들이 깊은 절망감과 박탈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다. ‘금수저’들의 ‘빽’에 밀려 들러리 노릇만 한 꼴이기에 더 그러하다. ‘빽이 있으면 취직하고, 빽이 없으면 백수 된다’는 ‘유빽유직 무빽무직’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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