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허투루 쓰고 있다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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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아멜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랑스어에 대해 차례차례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는 소중히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한 대목이다. 프로이센 프랑스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바람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는데, 그 금지되는 프랑스어로 진행하는 ‘마지막 수업’을 어린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아멜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며 칠판에 적어 놓은 말, ‘프랑스 만세!’는 가슴 짠하게 하면서 우리를 비장한 감동으로 몰아넣는다.

프랑스는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선진국이다. 하지만 그게 그냥 된 게 아니다. 프랑스 국민의 국어 사랑과 그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하다. 모국어 보호로 구체화한다. 프랑스인들은 거실에 사전을 두고 들춰 볼 정도라는 것이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답게 자기 것을 그렇게 존귀하게 여긴다.

우리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말살이라는 참혹한 수난을 겪으며 국어를 지켜온 긍지를 간직하고 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말 사용이 질서를 이탈하면서 혼란스럽다. 나라말은 한 나라의 정신일진대, 말의 무질서한 사용이 국민정신의 근간을 뒤흔들어 버릴 게 심히 우려된다.

말을 허투루 쓰는 걸 일상 언어생활에서 실감케 된다.

“커피가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십시오.” 어렵잖게 늘 듣는 말이다. 극존칭 어법으로 착각해 쓰지만 틀린 말이다. 커피가 나오시고 물이 뜨거우시다니 말도 안된다. ‘-시’는 행위의 주체를 높이는 문법소 아닌가. 과공은 비례다.

“나와 당신의 생각은 틀리다.”라 하면, 상대방을 ‘옳지 않다’고 비난하는 게 된다. ‘다르다’는 같지 않다, ‘틀리다’는 바르지 않다 또는 옳지 않다는 의미다. 일상에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야채’는 들에서 나는 것, ‘채소’는 밭에서 가꾼 것인데 생각 없이 혼동해 쓴다. 차라리 ‘나물’이라 하면 좋을 것을.

‘너무’를 잘못 쓰는 수도 적지 않다. 정도에 지나치게란 뜻을 갖고 있는 부사다. “너무 빨리 달린다”, “이 문제는 너무 어렵다.”라야지 “너무 예쁘다”나 “너무 말을 잘한다.”는 맞지 않다. 대신 ‘아주, 매우’를 써 보면 분명해진다.

“좋은 하루 되세요.”도 말이 안되는 비문(非文)이다. 될 게 따로 있지 화자가 청자에게 ‘하루가 되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어쨌든 말이 통한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 언어생활이 추락해 엉망이 되고 만다. 언어가 질서를 잃어버리면 사람들 정신이 흐려지고 마침내 국민정신이 망가진다. 종국엔 문화생태계가 파괴되고 말 것은 불문가지다. 이런저런 조야(粗野)한 언어의 남용이 언중의 정서를 거칠게 해 사회적 혼돈을 부추기기 십상이다.

우리말을 허투루 쓰는 사례가 신문, 방송, 간판, 제품 이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넘쳐나고 있는 게 우리 언어 현실이다. 심지어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는 저자들조차 외국어·외래어를 무분별하게 쓰고 문법을 무시해 글을 쓴다. 국어는 그 나라 국민의 정신인데 부끄럽고 한심스러운 노릇이다.

어법도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지키라고 정한 것이다. 어법에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 쓰는 것, 위법인 줄 뻔히 알면서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말은 영혼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말에도 품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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