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씨가 마르고 있는 ‘탐라의 보물’ 구원의 손길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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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산담…개발 가속·땅값 상승·화장 증가 등 원인
70년대부터 도굴·밀반출 성행…제주 정체성 혼란 야기
▲ 이문교 선생이 언론사 기자로 활동할 당시 촬영한 1970년대 중반 도굴된 동자석들.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새마을 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 때 진성기 선생은 제주 문화의 가치를 보물로, 제주섬을 ‘남해의 보물섬’으로 인식한 최초의 제주인이다.


그때 그는 제주문화가 관료주의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통탄하면서 최소한의 제주 문화라도 보존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말을 귀담아들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는 초가가 몸은 놔둔 채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뀌는 광경을 보고 “솜바지 위에다 양복저고리와 갓을 쓴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과 같다”고 풍자했다.


제주 문화를 정의함에 있어 ‘역사와 기후 조건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삶의 실체’라고 자각한 그는 먼저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고, 유형‧무형문화재든 그늘에 묻힌 보물덩이를 하루빨리 캐내어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는 민속예술 경진대회에 경악하면서 왜곡되든 말든 상을 주며 장려하는 보여주기 식 대형화의 가짜 문화를 경계했다.


제주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큰 생채기를 입었다. 한국전쟁 후 다시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근대화(서양화)의 힘에 눌렸으며, 지금은 세계인의 관심 장소가 되면서 문화 찾기를 외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제주는 지금, 돌문화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희망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이미 해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마치자 끝난 잔칫집과 같은 형국이다.


해녀는 이 순간에도 그 수가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고, 돌문화는 훼손의 경지를 넘어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지만 마치 말짱한 원형이 보존된 양 세계대회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문화유산의 의미를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1970년대에 등장한 민속 경진대회처럼 캠페인성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문화는 특정인의 주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축제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가 돼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대형화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억지로 문화를 떼어다가 행사장에서 일 년에 하루만 보여주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하루만 보러 가는 관객이 되고는 다시 일 년 후의 시간을 기약한다.


그러고선 스스로 자신의 문화는 재미없고 시시하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문화는 동원되는 게시대 문화, 비장소성의 문화를 기획하고 있다. 사실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과연 세계 문화의 가치가 있는가. 있다면 그 유산은 어느 만큼 잘 보존되었고 이대로 어떻게 존속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따라야 한다. 평소에 신경을 썼더라면 문화를 왜 공표하고 선언하겠는가.


한편에서는 사라지는 문화에 대해 손을 놓은 채 방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문화가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었으면 한다.

 

▲ 훼손돼 방치된 동자석의 모습.

▲산담의 수난시대


지금도 간혹 시골 마을 어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페인트로 4H 마크가 그려진 둥근 돌을 볼 수 있다.


이 돌은 정미소가 없던 시절 ‘몰방’에 놓였던 연자방애의 윗돌로 새마을 운동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이 상징물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낡은 것이자 미신 타파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소위 골동품 수집이 전국을 휩쓸자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등 무덤 석상들이 마구 외부로 유출됐고 원형 돌하르방 두 기도 슬며시 육지로 반출되었다.


전통마을을 새마을로 개조하면서 남아있는 유형문화재들이 밀반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개발의 붐이 일면서 밭담과 산담들이 매립되거나 담장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1975년 11월 3일자 <제주신문>에는 도로공사 건설업체 인부가 어승생과 영실 진입로 공사 때 네 트럭분의 산담을 훔쳐다가 도로공사에 사용했다가 적발된 사례도 있다.


물론 이것은 먼지에 불과했다. 그 무렵 항만, 도로, 매립 공사에는 환해장성, 밭담, 산담이 동원되었다. 산담은 다행히도 1980년대까지 계속 조성되기도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장묘문화의 변화로 인해 다시 절멸의 위기로 접어들고 있다.


산담이 사라지는 이유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데 인구 증가로 인한 개발의 가속, 철리[遷移;移葬]의 증가, 땅값의 상승, 농업의 포기  등 때문이다.


인구의 증가에 의한 개발은 투자 유치와 관광객의 증가, 내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내‧외국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가속화되고 있는 데 관광단지, 테마파크, 택지 개발, 타운하우스 조성, 신설도로 및 도로 확장, 매립, 조경 등의 개발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는 철리[遷移;移葬]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자손들의 외지 출타, 저출산, 산업의 변동으로 생긴 무덤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가족묘지나 납골묘, 화장묘가 증가하고 있다.


또 갑자기 불어닥친 농산물 개방으로 인한 농업의 포기, 제주 지역의 땅값 상승 또한 결국 외지 자본의 점유로 이어지면서 크고 작은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 1975년 11월 3일자 신문에 보도된 산담 절도 사건.

▲동자석과 문인석의 절멸 시대


제주도 무덤 석상 또한 소멸기로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말 동자석 도굴되면서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2017년 지금은 그야말로 제주 무덤 석상의 씨를 말리는 절멸의 시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동자석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당시 언론사 기자였던 이문교 선생(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당시 경찰청 출입 기자였는데 화물선으로 밀반출되던 동자석 70여 기를 압수해 보관하고 있는 용담동 폐가 마당을 찾아가 동자석들을 찍을 수 있었다. “나는 동자석과 만남을 통하여 사회문화적 가치로 보호되어야 할 정신이 무엇인가를 새삼 살펴볼 수 있었다. 흙덩이와 쓰레기로 뒤범벅된 70여 점의 동자석을 닦아내고 촬영하면서 나는 조상의 얼까지 팔아넘길 정도로 자존(自尊) 정신을 망각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세대들을 고발하겠다고 다짐했다.”      


1970년대 이후 무덤 석상의 수난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지금까지 해마다 동자석 도굴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언론 보도를 탄 것은 2001년 김만일 무덤 등 동자석과 문인석 18기를 회수했으나 그 후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이 2차 표적 도굴이 돼 다시 2기가 재도난 당한 사례가 있다.


같은 해 11월 쌍계[쌍결발] 형태의 동자석이 가정집에서 발견돼 도굴범이 적발되기도 했고, 또 2003년 6월 24기의 무덤 석상을 용달차에 싣고서 카훼리호를 타려던 40대 도굴범이 해양경찰의 검문에 의해 검거되기도 했다.


2004년에 서귀포시 모 박물관 지하실에서 동자석 8기를 회수한 사례, 2017년 10월 15일 동자석 18기를 훔친 40대 도굴범이 검거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동자석들의 유통 경로를 보면 배를 타고 부산이나 목포로 밀반출된 후 인사동에서 세탁을 거친 후 다시 제주로 팔려오기도 하지만, 많은 수의 동자석들은 미술관, 박물관, 개인 부잣집, 일본, 미국 등지로 밀반출되기도 했다.


문화재의 위기는 곧, ‘나는 누구인가?’ 라고 제주인의 정체성과 정신 세계마저 사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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