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갑인년 흉년에 먹다가 남은 것은 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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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의 난
▲ 1901년 5월 제주 민중들의 저항인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다. 신축년(辛丑年)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축교난’ 또는 ‘제주민란’, ‘제주교난(濟州敎難)’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은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장소인 아부오름 굼부리 모습.

▲강봉서姜鳳瑞:1746(영조22)~1823(순조23), 문신. 본관은 진주. 애월읍 어도(도노-미:봉성)리에서 문신 강치황姜致璜의 후예로, 또 강석기姜碩期의 증손으로, 강시양姜時揚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의 묘는 애월읍 곽지리의 ‘버들-못’경에 있다. 그는 본디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 말을 잘했던 선비이다.


1774년(영조50) 제주순무어사 홍상성洪相聖이 내도, ‘사호성주부賜號星主賦’라는 시제試題를 주어 글을 짓게 하고 그 답안지를 중앙에 가지고 가서 홍문관 제학 이담李潭이 과차科次(성적 등급)하니 합격되고 이듬해 전시를 보았다.


이때 제주 사람으로 그와 장한철張漢喆(애월), 김경회金慶會(토산) 등과 함께 세 사람이 문과 급제를 한 것이다.


관직은 전라도 남원의 오수獒樹찰방과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793년(정조17)에 이어 이듬해까지 흉년이 계속 들어 이른바 갑인년(1794) 대기아가 발생되었다.

장령 강봉서는 이 참상을 보고 못 참아 1793년 12월에 상소를 올려 “당시 제주목사 이철운李喆運과 정의현감 고한조高漢祚의 실정과 부정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즉시 안핵어사按覈御史로 홍문관 교리 심낙수沈樂洙를 제주로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강봉서와 수령 양측의 싸움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목사 이철운과 현감 고한조는 파직되고, 상소한 강봉서에 대해서는 지방 백성으로서 목사를 탄핵하는 일은 풍속과 교화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해서 관직을 바꾸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1794년(정조18) 4월에 목사 이철운을 고금도古今島로, 어사 심낙수를 제주목사로 임명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하였다.


제주의 속담에 “갑인년 흉년에 먹다가 남은 것은 물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이때를 두고 하는 말인데 도민의 한 사람으로 눈뜨고 볼 수 없어 탄핵을 주장한 강 장령이나 어찌 하늘의 뜻에 의해 흉년이 들었는데 낸들 어쩔 수 없었다는 지방 수령이나 모두 관직이 멈칫거리게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에는 충암묘冲庵廟의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자 그 일을 총감독하는 동역董役을 맡아 이를 완성하였다.


충암묘는 충암 김정金凈의 사당인데 1578년(선조11) 봄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가 가락천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강봉주姜鳳柱:1913(일제강점기)~1985, 충남 예산농업학교 학생 항일활동. 본관은 진주, 강현순姜炫淳의 아들로 산북 삼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1927년 전주제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3학년을 졸업, 같은 해 4월 충남 예산공립농업학교禮山公立農業學校 4학년에 입학하였다.


아들이 있는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에서 1985년 9월 25일 사망했다.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국인 학생 차별 정책에 분노를 느끼던 그는 학우 정종호鄭鍾浩, 한정희韓定熙 등과 비밀리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4월 예산출신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해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좌익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연구부, 조직선전부, 에스페란토어부語部 등 3개 부서가 설치된 좌익 협의회에서 연구부를 담당한 그는, 동년 5월 14일과 22일경 두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김용재金用在 등 선배 졸업생들과 동교 학생 8명을 동지로 규합하여 항일 투쟁 이론과 투쟁 방법을 연구해 나갔다.


1932년 6월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무리한 동원령을 내린 것을 계기로 노력 동원의 부당성, 일본어 과목을 국어로 표기하는 반민족적 처사의 시정, 일인 학생과 한인 학생의 차별 정책 개선, 한인 교사의 채용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동년 7월 학교 당국으로부터 좌익 협의회의 회원들이 다수 학사 처분을 받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감시 강화로 동회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동년 9월 18일 조직 재건에 합의하여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하고 연구부를 담당하였다.


먼저 동교 안에 김형래金炯來 등 5학년생과 이종규李鍾圭 등 3학년생들을 각각 대표로 임명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동년 11월경 조직 관리의 위장 방법으로 비밀 결사 명칭을 회합일인 토요회로 개칭하는 한편, 지방의 청년들과 투쟁 방법을 협의하였다.


1932년 11월 관제 연극 단체인 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시장 터에서 일제가 만주滿洲의 마적으로부터 재만在滿 한인을 보호한다는 반민족적 내용이 담긴 ‘동방의 빛’이라는 연극을 공연한 일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연 관람 거부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 극단에 공연 중단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11월 27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운동에 관련된 동지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그가 최고형을 받았다.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하니 동년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전라북도 옥구군 태생인 양재귀梁在貴와 결혼하여 전주에서 다년간 생활하였다.


▲강봉헌姜鳳憲:생몰년 미상, 세무 관리, 대정군수. 호는 노곡魯谷, 평안도 평양 출신, 조정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捧稅官, 강봉헌은 결호조사위원結戶調査委員을 겸임, 잡세를 징수하게 됨에 토착민으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9년 8월에 제주봉세관에 피임되어 이듬해 10월에 입도한 뒤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축교란이 발생하자 1901년 5월 10일 서울로 피신했다가 5월 31일 다시 제주로 들어왔다.


5월 31일에 다시 대정군수로 부임, 본도에 들어와 엄청난 잡세를 징수하였다.


동년 7월 17일 민란 관계자 40여 명이 압송될 때 강봉헌도 서울로 호송, 동년 10월 하순 무죄선고를 받았다. 


※강봉헌은 과거 없었던 어업세를 거두고, 묘세墓稅, 항수巷樹, 원목園木, 청초靑草, 아초芽草에 증세하고, 각 마을의 신당, 신목이 있는 공유지와 목장지, 기타 국유지 등을 일반에게 분매分賣하였고, 각 포구에서 나는 잡물에 대해 집세執稅하고, 화전으로 오래된 땅에 대해서도 새로 개척한 땅이라 하여 세금을 거뒀다. <김옥희 저서, pp.78~79>


이러한 일에 천주교인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동년 12월 7일 내장원內藏院 소관 경기도 각 둔토各屯土 목장사검위원 강봉헌을 제주목각둔토 목장사검위원을 겸임하도록 발령하였다.


1900년 9월 내장원內藏院 봉세관으로 임명되자 내도, 세금 수납을 남발, 원성을 크게 듣게 되고 신축민란의 유발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

 

1901년 2월 관보에 보면 “각도에서는 세금 부담이 정장定章에 의해서 실행하는데 제주목에 한해서 갑오경장 이후의 각세의 수입을 알지 못하니 이로써 동 2월 8일 내장원의 봉세관 강봉헌을 제주목 각세 조사위원으로 파견하였다.


 또 동년 6월 29일 제주목 각 군둔郡屯 폐지 및 각진둔各鎭屯 검사위원으로 권태현權台鉉을 임명하였다.”고 되었다.


1901년(광무 5) 5월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봉세관 강봉헌을 임명하였다. 이에 도민들은 “오히려 나무단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이는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이 잘못된 판단으로 발령된 것이다. 당시의 지방 수령으로서 제주목사는 이재호李在頀이며 또 제주군수는 김창수金昌洙가 재임하였다.


대정군수 강봉헌이나 제주군수 김창수는 짧은 기간 재임하고 1901년 6월 6일 함께 떠났다.


 봉세관으로 온 도민의 원성을 받던 터라 동 6월 6일 강봉헌을 중추원 의관으로 발령, 후임 대정군수로 허철許撤을 임명하자 내도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은 유림 오대현(吳大鉉)과 관에서 채구석의 연락담당을 맡았던 이재수(李在守) 등과 의기투합해 상무사를 설립했다.


대표로 대정군수 채구석을 추대한 뒤 도민회를 연 그들은 봉세관의 탐학과 천주교도들이 저지른 비행을 낱낱이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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