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된 후 복원된 탐라성주 고봉례부부 방묘. 두 기 모두 고려시대 무덤 양식이라 부르는 방형의 무덤이다.

▲화북동 거로마을 능동산의 부부 방묘


2017년 여름의 지독한 더위가 한 풀 꺾인 듯한 날, 거로마을을 돌아가는 마른 화북천은 여전히 열기를 머금은 채 누웠다. 봉긋한 동산에 두 기의 방묘가 과수원 가운데 오롯하게 서 있어야 할 모습이 수풀 더미에 가려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이미 필자가 능동산 방묘를 다녀간 날이 2004년 12월이었으니 햇수로 치면 벌써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거진 수풀을 대충 헤쳐 두 기의 방묘를 확인하고는 주변을 돌아보는데 가을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듯 벌레 소리가 처량하다. 인간사 가고 나면 아쉽고 모두가 그리운 법이다. 이유와 어떻든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여전히 세상은 산 자들의 고뇌에 찬 아우성만 들리고 그들의 탐욕만 하늘을 덮고 있다. 무덤 앞에서 생각하는 인생이란 그저 지나온 세월만 탓하는 산 자들의 후회만이 뜬구름이 되어 흘러가는 것 같다.


두 기의 방묘 뒤로 한라산은 동서로 양 날개를 벌린 듯 당당하다. 제주 오름의 조종산(祖宗山)인 한라산은 만고의 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태로 빛나는 여름 하오의 햇살을 받아 더욱 푸르고 가깝다.


‘탐라지 곤(耽羅誌 坤)’, ‘증보탐라지 7(增補耽羅誌七)’, ‘고금사적(古今事跡)’에 “(…) 능동산을 증보한다. 고을 동남 10리에 오랜 무덤 1구(丘)가 완연하다. 세간에 전해지기를 왕자묘라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지명에서 불리는 것처럼 예사로운 무덤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1996년 12월 6일~12월 25일까지 탐라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조선시대 무덤이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발굴은 당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무덤의 주인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생존했던 탐라의 마지막 성주 고봉례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고씨세보(高氏世譜)’에 ‘좌도지관(左都知管) 고봉례(高鳳禮)의 묘가 화북·거로 지경에 부부 합장묘로 안치되었다’라는 내용이 있고, 구전(口傳)으로 능동산이라는 지명으로 보아 무덤 주인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비로소 발굴하게 된 것이다.


현재 능동산에는 발굴한 후 복원해 놓은 두 기의 석곽 방묘가 해발 70여 미터에 이르는 나지막한 거로마을 남쪽 자락에 나란히 누워 있다. 능동산이란 말 그대로 '능이 있는 동산'이라는 뜻인데, 능(陵)은 일반 서민의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릉, 혹은 왕족의 지칭하는 무덤을 말한다. 

   
▲ 수풀 더미에 가려져 찾기 힘든 부부 방묘는 1996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지명으로 보면 이 동산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무덤이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 능동산에 조성된 두 기 모두 흔히 고려시대 무덤 양식이라고 부르는 방형의 무덤이다. 무덤의 크기는 관찰자 시점에서 우측 무덤이 가로 3.35m, 세로 4.2m, 좌측 무덤이 가로 3.1m, 세로 4.16m 정도로 두 기가 비슷하다. 높이는 120~140cm 정도, 무덤의 형식은 직사각형 봉분의 주변에 다듬어진 판석과 할석을 세워서 사방을 두르고 봉분 속의 중앙에 나무 관을 묻은 토광이 있으나 목관을 안치했다는 나무(木質)나 쇠못(鐵釘)이 없었다. 사실 목관이 안치돼 있었지만 도굴로 인해 무덤이 훼손되면서 빗물이 들어가 삭아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고봉례 추정 무덤의 발굴 결과는 ‘탐라성주고봉례묘추정지(耽羅星主高鳳禮墓推定址)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피장자의 신분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지석(誌石)이 없는 까닭에 무덤 주인과 무덤의 조성 시기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오래 전에 이미 몇 차례 도굴을 당한 터라 발굴된 유물 또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두 기의 방형 석곽목관묘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백자편 3점, 흑상감청자편 1점이었고(A구역), 이 방형 석곽목관묘와 병행해서 발굴했던 인근 토광묘 3기(B구역)에서는 분청편 1점, 백자편 4점이 발견되었다.

 

또 이 구역에서 발굴된 석물관련 유물로는 17세기 말에 제작된 목이 부러진 조면암재 동자석 1기, 현무암재 상석, 대석, 토신단 등이 있다. 이 보고서는 출토 유물을 종합하여 A구역 방형의 석곽목관묘를 일반 신분의 묘가 아닌 탐라성주 고봉례의 부부의 쌍묘일 가능성으로 보았고, 인근 B구역 3기의 토광묘 가운데 2기는 조선 중기 이후, 1기는 조선 말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부부 방묘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60-4호로 2008년 4월 8일 지정되었다.


▲마지막 탐라성주 고봉례


고봉례는 고신걸(高臣傑)의 셋째 아들이다. 신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위로 두 명이 일찍 죽고, 봉례(鳳禮)와 봉지(鳳智)가 남았다. 봉례(鳳禮)의 자는 백공(伯恭)이다. 1386년 추7월에 탐라의 사람들이 말을 조공하는 일로 반란을 자주 일으키니 대호군(大護軍) 진여의(陳汝義)와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 1352~1432)에게 탐라에 가서 말을 가져오게 하였고, 1387년 4월에 탐라성주의 아들 고봉례를 인질로 삼으면서 그에게 군기소윤(軍器少尹)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이듬해 고봉례를 제주축마겸안무별감(濟州畜馬兼按撫別監)에 제수했다. 고봉례는 정권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자 즉시 양마(良馬)를 바쳐 조선에 충성심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쌀을 하사하였다. 태종 2년(1402) 고봉례는 왕자 문충세와 함께 상경하여 세습된 성주·왕자 칭호를 바꾸어 주도록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성주(星主) 대신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에게는 우도지관(右都知管)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신라 이래 세습된 성주·왕자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 후 그는 통정대부 공조좌참의(通政大夫工曹左參議)를 거쳐 1407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 1410년에는 제주안무사가 되었다. 고봉례가 말을 자주 바치자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쌀을 하사했다.


1411년 8월, 아들 상온(尙溫)에게 자신의 직위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洲官左都知管)을 세습해줄 것을 청하고 같은 해 11월 29일 한성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이 소식을 접한 태종은 매우 슬퍼하면서 섬을 떠나 자신에게 충정을 바친 고봉례에게 종이 150권, 초 10자루, 쌀과 콩 40석, 관곽을 하사했다.


고봉례가 죽기 전 네 달 전인 7월 4일, 그의 동생 고봉지(高鳳智)는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가 제주에 귀향하였고 섬에서 병을 얻어 먼저 사망하였다. 봉지(鳳智)는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영곡(瀛谷) 고득종(高得宗)의 아버지다. 고득종은 조정의 부의(賻儀)를 받고 아버지의 장례 후 제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버지 무덤 곁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3년 상을 치렀다. 인류학자 고 김인호 선생은, “제주인의 장법은 몽골처럼 원래 ‘봉분을 만들지 않고 표식 없이 깊게 묻는 장법(上不起墳 深葬無標)’이었으나 아버지 고봉지의 장례를 치른 고득종으로부터 제주 최초의 매장풍습이 생겨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15세기 초 제주에서 3년 상을 가장 먼저 치른 사람으로는 1406년 전 주부(主簿) 문방귀였으며, 당시 이를 본받아 무덤을 지킨 자가 3인이며, 3년 상을 치른 자 또한 10인에 이르렀다. 고려로부터 유교식 상·장례인 3년 상이 시행(공민왕 1년, 1357)된 후 제주에 3년 상이 도입된 지 51년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