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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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수필가

“남원리 김씨가 요 며칠 안 보이던데,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닌가?”

 

런닝머신 속도를 높여 달리기로 한껏 땀을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걷기운동을 하시던 노인께서 혼잣말처럼 물음을 던지셨다. 83세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하시고, 삶의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단아(端雅)한 아우라로,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어르신이시다.

 

서귀포시 동부보건소. 퇴임 후 새로운 나의 웰빙 공간이 되었다. 이웃사촌들과의 원활한 소통과 곰살맞은 인정은, 덤으로 얻을 수 있어 더욱 즐겁다.

 

특별한 규정은 없지만, 세대별 이용 시간은 ‘라이프스타일’ 차이로 자연스레 구분된다.

 

아침나절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젊은이와 주부들은 저녁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노인그룹은 85세가 최고령인데, 80세 안팎 분들이 적지 않아 ‘백세시대’를 실감한다.

 

느릿느릿 자전거를 타시거나 가벼운 근력운동을 하시면서, 호형호제로 대화를 나누신다.

 

그분들의 삶과 얘기들을 눈·귀동냥하면서, 계절처럼 다가오는 나의 노년을 엿본다.

 

“그 친구!, 요즘 비닐하우스 시설하느라, 여기 올 겨를 없습니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아령 운동을 하시던 한 노인이 한 편에서 화답하셨다.

 

그제야 모든 분들이 안도의 날숨을 쉬었고, 서서히 표정들이 환해지셨다.

 

당연히 노인들은, 노환이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禁忌視)한다.

 

“그 친구 앞으로 얼마나 산다고, 그 나이에 새 일을 벌일까. ‘돈독’이 올라도 톡톡히 오른 모양이지”. 또 다른 노인이, 기어코 한 마디를 끼워 넣으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그 말에 동의하고 거드느라 순식간에 왁자했다. 돈도 이 곳에서는 금기어인 것이다.

 

잠시 후, 내 옆의 어르신이 입을 떼고 나서야, 모두 입을 다물고 귀를 세웠다.

 

“그 친구, 일흔 여덟에 참 안타깝구먼. 이제 다 내려놓아야 하는데 외려 붙들고 있으니…. 사람이 열 살 때까지 세상물정 모르고 지내듯, 세상 떠나기 전 10년은 모든 것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고 들었네. 평생 온몸을 옥죄던 것들 다 벗어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늙어서 명예나 돈, 자식타령은, 치매보다 더한 노추(老醜)의 미망(迷妄)이네. 대신 하루를, 이승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하네. 은둔 속에 삶을 반추(反芻)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몸 낮춰 잘못을 빌고, 혹시 베풀 것이 있으면 남김없이 베풀어야 한다네. 무엇보다, 몸이 허락할 때까지는, 지금처럼 웃으시며 운동 열심히들 하세나. 창살없는 감옥인 요양원 자리보전할 생각들 말고, 저 세상에서 부르면, 아무 미련없이 떠나들 가세. 어차피, 사람 한 평생,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아니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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