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벌초문화는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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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제주에서는 조상묘의 벌초(伐草)를 안 하는 것은 ‘불효 중의 불효’로 알고 있다.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해 형제, 4촌, 8촌 할 것 없이 같은 문중이 모여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는 것은 제주의 오랜 전통이다. 추석 때까지 벌초를 안 한 묘소가 있으면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조상의 대가 끈긴 묘라 해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식께 안 헌 건 모르곡 소분 안 한 건 남이 안다”고 했다. 벌초하는 요즘 시기에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의 들녘 묘역에 벌초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벌초 때면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이 벌초를 하기 위해 대거 고향을 찾는다. 일본에서도 제주 출신 교포들이 줄지어 제주를 찾는다. 벌초 귀향객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제주행 항공권 구하기가 힘들어지면 각 항공사들은 귀향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특별기를 투입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적하던 산천이 벌초와 성묘하는 후손으로 북적이고, 잠시지만 집마다 대가족 문화가 부활하는 듯하다. 조상에 대한 감사의 의례라고 볼 수 있는 벌초가 언제부터인가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은 일로 여기는 이도 있다.

벌초를 해보면 흘린 땀으로 온몸이 흥건히 젖는다. 하지만 그것은 청량제 역할을 한다. 벌초 일에 온몸이 고달파도 조상 묘소 앞에 간단하게 과일과 소주 한잔 올리고 큰절을 하거나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조상과 스스로 묻고 답하는 독백의 시간을 가져 보라. 내가 살아가는 하나하나가 발자국이 되어 후세대 앞에 본보기로 선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처럼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본채 질주하고 살아도 인생은 끝이 있고 그 후의 실경(實景)은 무덤일 뿐이다. 조상의 묘 앞에서 얻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조상의 묘소 앞에서는 아무리 콩가루 집안의 자식도 숙연한 마음을 가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 자기성찰의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효 의식이 엷어진 요즈음 세대들은 죽은 조상에게 하는 벌초와 성묘가 뭐 대수롭냐고 반문하지만 벌초 작업을 끝마치고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 4촌, 8촌 등 혈족이 모두들 둘러앉아 준비한 새참과 음료에 이은 점심 식사는 꿀맛이다. 이러한 만남에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아닐까?

“벌초 했수과(했습니까).” 민족의 최대의 명절 추석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와 성묘 행렬이 본격 시작되었다. 제사는 안 지내도 벌초는 꼭 한다는 제주의 독특한 섬 문화는 이어지고 있다. 유별난 벌초 문화다. 제주에서는 벌초 방학, 벌초 휴가가 있을 정도이다.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벌초 방학은 생생한 효의 현장교육이라는 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행사”이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도 아무리 바빠도 벌초 휴가만큼은 내준다. 공무원도 예외가 아니다. 벌초의 형태도 많이 진화했다. 2사이클 동력장치가 달린 예초기가 동원되는가 하면 구충용 스프레이 살충제와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쑥 전용 제초제까지 동원된다.

앞으로는 더 급변할 것이다. 아예 벌초가 필요 없는 화장(火葬) 후 자연장을 선호하는 집안도 하나둘 늘어나는 추세다. 벌초와 성묘 때 혈족이 만나 함께 땀을 흘리고, 서로의 안부와 옛 얘기를 나누는 일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벌초는 유정(有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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