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한천의 방묘. 원래 석곽이 없는 직사각형 방묘였으나 1994년 현 가시리 청주한씨 가족 묘원으로 조성되면서 대리석을 사방에 둘렀다.

인간에겐 경우의 차이가 있지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은 단 한 번뿐이다. 그 일생 동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하게 전개되는 데 그것은 운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상황적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진 당대의 조건에 따라 그것에 적응하는 것, 즉 자신의 가치 판단이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도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만난다. 인류 문명에서 인간이 다른 종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구를 만들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며, 그 능력은 결국 어떤 혹독한 환경이라도 적응을 할 줄 아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에게 도덕이나 철학이 없었다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인간의 상태가 동물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정감(情感)과 이성(理性)이 있어 이 두 가지의 적절한 조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한국인에게 주목받았던 것이 효와 충이었다. 인간과 군주의 관계에선 ‘인(仁)’이 바탕이 되었고 세대 간에는 예로써 사람을 대했다. 부모 세대로선 이런 사상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고, 자녀 세대에겐 이런 관계가 고리타분하고 번거로운 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은 ‘역사’라는 말로 남겨진다. 흔히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의례’를 행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특정 사상이나 시대를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은혜의 표현 방법이다. 은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세대 간 의로운 생각이다.


의례는 귀천과 빈부를 떠나서 어떤 형태로든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해 왔다. 필자가 인간을 기념비적 존재로 보는 것은 세대 간 표현 행위의 결과이자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충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군주의 입장에서, 혹은 민의 입장에서, 또 권력의 입장에서, 혹은 사상의 입장에서 말이다. 망한 고죽국의 왕자들로 주나라가 베푸는 풍족한 음식을 거부하고 산속에서 굶어 죽었던 백이 숙제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의(義)의 상징이 되었다. 의는 ‘만고불변’한 행위 규범이지만, 그것을 일관되게 지켜내기란 실로 어렵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의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가’라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산적으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생각과 행동이 너무나 다른 사람들, 조그마한 이익에 눈이 멀어 배덕의 길을 쉽게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공자는 “길이 다른 사람과는 서로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사람을 판단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같이 지내봐야 사람의 진실 됨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추운 계절이 되고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비유했다. 제주 유배인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뜻도 이러했다. 


결국 사마천의 말처럼 ‘물이 흐려졌을 때 깨끗한 물의 중요성이 더욱 드러나는 법인데 마냥 돈 따라가는 세상에서 의를 지켜내기란 유혹이 끈이 너무 길다.

 

   
▲ 한천의 방묘 옆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천이 제주로 온 까닭


누군가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고려의 신하에서 새로운 왕조의 군주가 된 이성계의 연유가 이러했다. 또한 앞날이 보장된 길을 거스르고 망한 고려의 부흥을 꿈꾸었던 한천이 고려판 불사이군의 상징이다. 만일 한천이 현실주의자라면 그는 새로운 왕조의 신하가 돼 새 시대를 여는 데 동참했을 것이다. 한천에게 따라다니는 불사이군이라는 충의 상징은 당대를 넘어선 후대의 평가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귀영화를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일편단심의 의리를 지켰던 그의 충심은 후대 사람들의 지조 정신을 자극한다.


한천의 호는 서재(恕齋), 청주인으로 생몰년 대가 확실치 않다. 고려 개국 시 삼한공신(三韓功臣) 한란(韓蘭)의 10대손이고, 할아버지는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 악(渥)으로 슬하에 다섯을 두었다. 아버지 대순(大淳)은 악의 맏아들로 벼슬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이르렀다. 부인은 광산 김씨로 두 아들을 낳았다. 


 한천의 벼슬은 공민왕 14년(1365)에 전리판서(典理判書), 공민왕 20년(1371)에 경상도도순간사(慶尙道都巡間使), 공양왕 3년(1391)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 공양왕 4년(1392)에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정2품)에 올랐다. 193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몰고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자 대제학 한천은 의분을 참지 못해 고려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한천의 사촌 동생 한리(韓理)와 함께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 진원군(晉源君) 강준계(姜準季)를 옹호하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부흥을 꾀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의 측근인 조영규(趙英珪)에게 피살되면서 계획이 수포가 되어 결국 두 왕자마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 고려 회복 사건으로 대제학 한천을 포함하여 찬성사 성석린(成石璘), 정당문학 이원굉(李元紘), 청성군 강시(姜蓍), 밀직제학 성석용(成石瑢) 등이 절도(絶島)로 유배되었다. 이때 대제학 한천도 제주도 정의현에 유배되었다고 전한다.

 

소위 새 왕조에 불복한 고려의 중신 70여 명은 숙청되었으나 유독 한천 만은 극형에 처하지 않은 이유를 역사학자 김봉현(金奉鉉)은  “한천의 종질(從姪·사촌의 아들) 한상경(韓尙敬·태종때 영의정 역임)이 신정권에 협력한 개국훈신으로서 힘이 큰데 이에 더하여 태조비인 신의왕후(信懿王后)가 한 씨였기 때문에 다소 봐줬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남은 한천이 유배형에서 풀렸는지 유배왔다가 1년 후에 다시 복권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1393) 7월 29일에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인유(姜仁裕)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한천 등 71인은 신씨(辛氏)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고서, 도덕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좋은 평판을 선포하여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그 공이 또한 높일 만하다. 그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는 기록과 정종 2년(1400) 6월 1일  “(…)권중화(權仲和)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아 치사(致仕)하게 하고, 이거인(李居仁)·권희(權禧)·한천(韓天)·최영지(崔永沚)·경보(慶補)를 모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아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라는 기록을 보면, 한천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복권된 후 정종 2년(1400) 6월 이후 벼슬을 물리고 스스로 제주에 낙향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고려왕조의 대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고 가까운 고려 중신(重臣)들이 죽음을 지켜본 후의 애타는 심정을 양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천이 후세에 넓게 알려진 것은 1879년 당시 유배인 신분이었던 공조판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유허비명(遺墟碑銘) 때문이다. 면암은 한천을 두고 “두 성(二姓)을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겨 공이 제주에 와서 향약을 세우고 선비들을 가르쳐 이 섬(제주)에 학문을 일으킨 인물” 임을 밝히고 있다.


▲한천의 방묘 


한천의 방묘는 현재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 지방기념물 60-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994년 12월 12일 설오름에 모셔졌던 방묘를 현 가시리 청주한씨 가족묘원으로 모시면서 원래 석곽이 없는 직사각형 방묘였으나 새로 대리석 판석으로 사방을 둘렀다. 한천 방묘는 속칭 궤야동산 지경으로 오르막 동산 위의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 뒤편에는 방묘 보호를 위해 토성을 쌓고 경치석 축담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장한 무덤의 크기는 가로 450cm, 세로 650cm, 높이는 약 170cm이다. 무덤 주변은 초가를 이는 새(띠)가 현대의 석물 사이를 지나는 바람을 타고 일렁이며 자라고 있다. 한천의 방묘 아래 층에는 소위장군의흥위부사직(昭威將軍義興衛副司直) 벼슬을 지낸 한계로(韓繼老, 1442~?) 부부의 방묘가 있어서 제주에는 조선 초기까지 방묘의 장법이 남아있는데 이는 조상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