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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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수필가

사람은 뇌에 담겨진 기억의 힘으로 산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 기억이 제공하는 정신적 시간 여행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개인사를 알지 못할 것이며, 기쁨의 순간들을 회상할 길이 없을 것이다. 기억상실은 우리의 자아감을 파괴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5월이 되자 언니가 더욱 보고 싶어 달려갔다.


성격이 밝고 청산유수였던 언니에게 찾아온 기억상실병은 아직도 내 가슴에 받아들일 수 없는 통증으로 남아 있다. 지난번에는 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떨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사랑요양원 문을 조심히 열었다.


“언니, 나 누구?”


잠깐 바라보다가 “막내!” 라고 퉁 쏟아내며 기억을 살려낸 대견스러움으로 미소가 활짝 핀 얼굴이다. 휠체어에 앉은 언니를 뒤에서 꼬옥 안았다. “막내야, 막내야!” 부르며 홀어머니 대신 날 업어 주며 키워 준 둘째언니는, 나의 친구이고 스승이자 어머니였다.


결혼 전까지 초등 교단에 섰던 언니는 가정학습지도는 물론, 노래·무용·연극까지도 당신의 재능을 동생들에게 전수했다. 시험문제 하나라도 틀리면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는 호랑이 선생님 같은 언니를 무척 좋아하며 따라다녔다. 


언니와 함께 한 기억은 어떤 것이든 행복하다.


일요일은 일기 검사 받는 날이었다.


- 오늘 뒤뜰에 가보니 복숭아꽃이 세 송이 피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몇 송이나 더 필까?-
“잘 썼네. 일기는 한 일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고 느낀 것을 쓰는 거야.” 언니의 칭찬 한마디는 글짓기의 씨앗이 되어, 그 후 일기를 동시 형식으로도 표현해 보았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 봐도 무척 감미로운 기억이다.


달 밝은 밤이면 동생들을 데리고 애월 해안가를 찾곤 했다.


♬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강 / 저녁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


은빛 찰랑이는 바다를 보며 한껏 폼을 잡고 노래를 뽑은 다음 ‘로렐라이 전설’을 얘기해 주면 내 귀는 쫑긋, 어느 새 내 마음은 라인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꼬마 적 익힌 이 독일 민요를 사범학교 입학시험 때 성악 실기 자유곡으로 채택했다. 고향 바닷가에서 언니와 함께 다시 부르고 싶은 추억의 노래 ‘로렐라이 언덕’ 이다.


말은 없어도 동생들을 보며 빙그레 웃음 띤 언니의 얼굴이 참 곱다. 가슴에 박힌 응어리를 다 털어내었을까,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은 남아 있겠지. 삶의 마지막까지 미소를 머금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봄 동경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이 우리 집에서 사흘 간 머물렀다. 학예회 때 언니의 창작극인 ‘꽃동산’에서 종이로 만든 창을 들고 벚꽃(일본의 국화)을 내쫓는 벌 역을 했던 경험이 삶에 활력소가 된다고 했다. 기억이 기나긴 인생행로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요즘 들어 기억의 지속성에 대해 관심이 커졌다.


저장된 기억이 바닥나기 전에 뇌에 담겨진 소중한 순간들을 진솔한 언어로 표현해 두고 싶다. 글을 쓰다 보면 희미해져 가는 기억도 선명해지면서 뇌도 더디 늙지 않을까.


내 생(生)을 표현한 글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


삶이 가장 뜨겁게 지나갔던 추억의 공간에 머물러 마음 한가득 담겨진 시(詩)를 읊어 보며 다시 한 번 꿈에 젖어도 보고, 또한 감춰온 시린 가슴도 글빛으로 열면서 따뜻하게 감싸리라.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보며 기억을 찾아 가는 내 영혼에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여정이 아직은 희망이고, 표현하는 과정이 행복인 것을….
내 인생은 이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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