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우리는 제주의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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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 천진동 포구에는 강관순이 지은 우도 해녀들의 항일항쟁을 기념하는 해녀의 노래비가 있다.

▲강계우姜繼遇:1789(정조13)~1856(철종7), 문신. 대정현감. 주성州城 서문 밖 금덕촌今德村‘유수암’에서 태어나 호를 수암水庵이라고 하였다. 자는 철보喆甫 혹은 내경乃敬, 본관은 진주, 여명汝明의 아들이다. 1815년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 1840년(헌종6) 8월, 정귀룡鄭貴龍의 후임으로 도임(지방관리가 근무지에 부임함)하고 1841년 3월에 파직되었다. 앞서 변경우邊景祐의 문하에서 수학, 그가 임금에게 올린 10개 진소陳疏가 있다.

 

1831년(순조31) 이예연李禮延 제주목사가 우학당右學堂을 명월리에 개설하였다. 이 일은 훈장 강계우의 수창(首唱ㆍ우두머리가 되어 제일 먼저 주창함)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벼슬은 외직에 대정현감, 내직은 승문원 교검,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1814년(순조14) 제주찰리어사 이재수李在秀가 내도하여 과장을 개설, 문과 4명과 무과 60명을 시취(試取ㆍ시험을 봐 인재를 뽑음)할 때 강계우姜繼遇ㆍ김영업金英業·김영집金英集·변경준邊景俊 등이 문과에 합격하였다.


1840년 가을 영국 군함 2척이 가파도에 내박, 방포放砲한 일로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과 함께 직을 떠났다. 그후 그는 1850년(철종 1) 성학(聖學)과 급히 시정해야 할 폐단 10개 조항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병조참지(兵曹參知)로 발탁되었다. 병조참지는 조선시대 병조(兵曹)에 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병조판서(兵曹判書: 正二品), 병조참판(兵曹參判: 從二品), 병조참의(兵曹參議: 正三品 堂上)가 있고, 아래로 병조정랑(兵曹正郞: 正五品), 병조좌랑(兵曹佐郞: 正六品)이 있다. 병조참의와 품계는 같으나, 참의의 다음 자리이다.


한편, 강계우가 대정현감으로 부임한 즈음에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헌종이 즉위하고 1840년(헌종6) 8월에 이르러 대사헌 김홍근金弘根이 10년 만에 다시 윤상도사건에 대하여 논죄할 것을 상소하였다. 임금에게 올린 10개조 상소에 면강성학으로 학문의 도는 독서하고 궁리하는 데 있으니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성의誠意를 다하여 정심正心으로 수신함이 그 근본입니다. 수개경연數開經筵하여 이에 윤상도 부자를 추자에서 잡아다가 대역무도죄로 국문 논죄, 윤상도는 능지처참하고 아들을 베어 죽였다.

 

또 연좌죄인들은 장사杖死 혹은 유배되는 경자옥사庚子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국문할 때 윤상도와 연좌죄인들이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끌어들임으로써 연좌의 변이 미치게 되었다. 다행히 영조 때 제주에 감저(고구마) 종자를 처음으로 전한 조엄趙儼의 손자인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의 도움으로 추사는 감사減死되어 대정현에 유배되니 때는 1840년 9월 4일이었다. ※(필자의 변) 조부로부터 듣기를 추사秋史 김정희는 제주성에 들여 일을 보고 문하생 김구오金九五의 집을 방문, 이후 대정성으로 가다가 유수암에 들려 강계우를 만나보고, 이어 문하생 곽지리 박계첨朴季詹 댁에서 하루밤 자고나서 말을 달려 대정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공흡姜公洽:1917(일제강점기)~1974, 혁명적 제주도농민조합 항일활동. 본관은 진주, 강필주姜弼周의 아들, 산북 협재리에서 태어났다. 1934년 혁명적 제주농민조합준비위원회 활동이 탄로나 동년 8월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앞서 한림공립보통학교 재학 때 협재소년회에 가입, ‘어린이’라는 한글 잡지를 탐독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텄고, 1931년 6월 윤한진尹漢珍의 단추공장에 취직, 1933년 1월 독서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민족 해방운동을 모색하였다. 또 동년 9월 명월리 소재의 한림보통학교를 한림리로 이설하는 데 있어서 무산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이설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1934년 7월 장용진張溶珍, 홍경옥洪卿玉 등과 함께 협재리에서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소년부를 담당,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강관순康寬順:1909(융희3)~1942(일제강점기), 제주 혁우동맹의 항일활동. 필명은 강철康哲, 본관은 곡산, 강대길康大吉의 차남으로 구좌읍 연평리<소섬>에서 태어났다.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 4절을 지었다. 앞서 우도牛島의 사립 영명永明의숙 4년을 마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문맹 퇴치운동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1년 3월 구좌면에서 청년운동가들 즉 당시 신재홍申才弘(우도), 오문규吳文奎(하도), 강관순康寬順(우도), 문도배文道培(세화) 등과 초등학교 교사 김시곤金時坤(세화) 및 농민 김성오金聲五(우도) 등은 신재홍의 주도로 비합법적인 비밀 결사 혁우동맹을 결성, 항일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면서 우도에서 운동 기반 조성에 노력하였다.

 

강관순은 1931년 6월 상순 자택에서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사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 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소섬의 고자화高子華 댁에서 고봉준高奉俊, 고원한高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고 칭하는 당외 기관을 만들어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이 되어 ‘적’을 순차적으로 좌경화·급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1932년 1월부터 구좌지역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사秘社의 내용의 탄로되어 일경에 피체,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 작사,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 왔던 부인 홍무향이 이 가사를 몰래 건너 받아 청년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乙種 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1942년 봄 함북 청진淸津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린 결과로 폐병으로 병사,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이후 유복녀와 함께 우도에서 정열貞烈을 지키며 살았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해녀의 노래’ 비碑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하루 종일 헤매었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코/일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저놈들의 착취 기관 설비해 놓고/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다/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그는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4절을 지었는데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하러 왔던 오문규의 부인 홍무형洪舞馨은 이 노래의 가사를 몰래 건너 받아 청년 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ㆍ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해녀의 노래’ 비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 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가사는 연평중 교장 김찬흡이 일본의 기록물을 접해 처음으로 다시 불러졌다. 각설却說하고, 강관순은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金聲五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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