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멎는 것은 째깍째깍 소리 내며 흐르던 시간이 떠났다는 얘기다. 시간이 떠났다 함은 숨을 거뒀다는 뜻. 시간 안에 머무를 수 있을 때 생명이다. 시간과 생명의 존재는 동일시된다. 시간은 생명이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말하고 사유하고 먹고 마시고 꿈꾸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긴다. 만지고 떠들고 뒹굴고 울고불고한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기도 한다. 존재는 자유다. 무장무애로 제약받지 않을 때 가장 싱그럽고 화창하다. 한 생명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그 안에 시간이 숨 쉰다는 것이다.

명품시계를 낀 손목을 시새워 할 필요는 없다. 값싼 가죽 띠면 어떤가. 시간만 잘 가면 되는 게 시계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선 안 될 게 있다. 명품이든 실용이든 사람이 그것을 끼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시계를 낌으로써 내가 혹은 그가 살아있다는 호흡을 느끼는 일이다. 돈이 많고 적음, 삶이 윤택하고 빈곤한 것은 다음 문제다.

나라의 의무는 국민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다. 시간 안에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게 바로 나라다. 시계는 시간을 재는 규범이라는 범위 안에서 소리 내며 돌고 도는 것일 뿐, 시계를 균일하게 나눠 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 추신수 선수가 귀국했다 예능 프로에 잠깐 얼굴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MC가 대뜸 “추 선수, 시계 비싼 거네요. 얼마짜리지요?” “6500만원이요.…많이 버니까.” 그의 연봉이 자그마치 228억이다. 그 비싼 시계에 대해 별로 토를 달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물질에 어지간히 단련돼 있다.

이런 빈부의 차이는 하루아침 새 좁혀지지 않는다. 쉬이 좁힐 수도 없는 간극이다. 좁히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뿐이다.

문제는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격랑 속으로 국민들을 몰아넣지 않는 지지대가 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속에 알을 가득 품은 꽃게에게 끓인 간장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꽃게는 알을 지키려고 엎드린 채 버둥거려 봅니다. 살 속에 스며드는 간장을 더는 어찌할 수 없어 꽃게는 알들에게 가만히 이릅니다. “애들아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어미가 덮어 준 마지막 말, 이불이었습니다.’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의 일부다.

천일(千日) 만에 세월호가 모로 누운 채 바다 밖으로 올라왔다. 조타실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사람들 앞에 공개됐다. 10시 17분 12초에 멎어 있었다. 배의 침수 한계선은 9시 34분, 그 시각 수면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시계는 멋도 모르고 바닷물이 차올라도 전기의 힘으로 날숨 들숨을 몰아쉬었던 것. 그새 아이들 11명이 선실에서 빠져나가고 승객 일부가 선미 쪽 출입문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10시 17분 6초, 배는 전복됐다. 애들아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식구들 방에 불이 꺼졌다. 6초 뒤.

나라더러 시계를 사달라는 함이 아니다. 싸구려 시계면 어떤가. 시간이 가는 대로 놓아둬 달라는 것이다. 이만한 요구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다. 나라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골든타임 하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으니 참담할밖에.

가습기 피해가 다시는 없어야 하고 퇴근 뒤 카톡으로 삶을 제약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갑남을녀의 삶은 굳건히 보듬어 줘야 한다. 그래야 나라다.

적어도 나라가 국민의 시간을 훔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제때 해야 할 일을 그냥저냥 내버려 두거나 적당히 뭉개는 행위는 평온해야 할 국민의 시간을 빼앗는 행위다.

시간은 생명이다. 섭리다. “밝았다. 애들아, 어서 일어나야지.” 이런 아침은 우리 앞으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