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아라동 제공동산에 있는 고조기 묘역. 육지의 방묘가 대개 납작한 사각형인데 반해 고조기의 방묘는 마치 제주의 초가지붕을 보는 듯하다.

▲왕이 인정한 제주출신 관리


1157년 2월 고려시대 제주인으로서 최고의 관직에 오른 고조기(1088~1157)는 향년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한 때(1135)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의 보좌관이기도 했던 고조기는 바다를 건너 제주에 묻혔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157년 2월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고조기(高兆基)가 졸하였다고 전한다. “조기의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이고 탐라(耽羅) 사람이다. 천성이 강개하고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 오언시에 능하였다. 인종(仁宗) 때에 대간이 되어 직언하기를 피하지 않아, 국정에 유익한 바가 많았다. 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평장사에 임명되었으나, 김존중이 권세를 잡았을 때 몸을 굽혀 구차하게 영합하니, 당시의 논의가 이를 비난하였다.”


고조기의 마지막 벼슬은 정 2품에 해당하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다. 사서에 의하면 고조기가 서거하자 왕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해당 관리에게 명하여 호상하여 주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람은 김존중이다. 김존중은 의종(毅宗)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세자 때에 의종을 가르쳐 왕의 측근이 돼 정권의 실세가 된 인물이다. 김존중은 승승장구 거의 모든 중요 직책을 역임하고, 임금 또한 김존중을 믿고 의지했다. 그가 죽자 왕은 최고의 장례의식을 거행토록 했다. 
김존중은 고조기보다 1년 전(1156)인 46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사람됨이 활달하고 기량이 크고 넓었으며 깊은 꾀와 먼 생각은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그의 사람됨이 전해온다.  

 

   
▲ 고조기 무덤의 동자석.

▲초가지붕 모양의 무덤


고조기의 무덤은 제주시 아라동 제공동산, 또는 제궁동산이라는 곳에 있다. 사람들은 이 동산이 제(祭)를 지내는 동산이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거나, 아니면 동산의 모양이 활처럼 생겼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실제로 동산은 둥글면서도 완만히 굴곡진 모양이다. 바람이 불 때면 청솔바람이 일어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한다. 제공동산에서 내려다보는 평야의 정경이 과거에는 참으로 시원했을 것이다. 


고조기 방묘는 북쪽을 약간 비켜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이고 봉분 위는 초가의 상모루처럼 돼 있다. 육지의 방묘가 대개가 납작한 사각형인데 반해 고조기의 방묘는 마치 제주의 초가지붕을 보는 듯하다. 제공동산의 평안한 능선에 무덤 자리를 잡고, 다시 무덤 뒤로 직선의 봉곳한 잔디 둑[莎城]을 쌓았다. 고조기 무덤은 한눈에 보아도 한라산을 태조산으로 삼고, 사라봉을 안산으로 삼은 형국임이 분명하다. 고조기의 봉분 크기는 앞 변의 길이가 3.9m, 뒷변의 길이 3.0m, 측변의 길이 4.8m이며 높이는 1.8m로 장방형이기는 하나 약간 사다리꼴이 된 형태다. 사방 네 귀퉁이에 현무암 자연석을 2~3단을 받히듯 겹으로 쌓아 올려 봉분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지지(支持)하고 있다. 잔디는 촘촘하게 잘 자라서 무덤의 분위기가 곱고 정갈하게 느껴진다. 당시에 어떻게 육지에서 반장(返葬)했는 지는 알 수가 없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현재 고려시대 무덤의 석물은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석물은 1960년대 석물로 보여진다.    


현재 세워진 무덤의 석물은 문인석 2기, 무인석 2기, 석양 2기, 동자석 2기가 마주 보고 있다. 옛 석물은 도굴되었는지 없고 지금의 석물들은 1960년대 쯤에 만들어진 석물들이다. 동자석의 양식이 20세기 후반기의 모습으로 각주형이며 민머리 형태에 음각으로 댕기머리를 표현했다. 


고조기의 무덤 좌측으로는 연꽃 모양의 화강석 비석이 심하게 마모돼 글자를 알 수 없는 무덤이 한 기가 있다. 이 무덤의 형태는 원묘이다.


제주의 원묘는 그리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기억나는 제주의 원묘는 김해 김씨 입도 김만희 무덤, 같은 제주 고씨 집안의 고이지 무덤, 김만일과 그의 부친 김이홍 부부의 원묘가 있는데 17세기까지 원묘의 형태가 제주에 남아있다.


방묘 또한 제주에서는 보기가 드물다. 여말 선초를 기점으로 제주에 낙향한 벼슬아치들의 무덤이 주를 이룬다. 가시리 청주 한씨 입도조 한천, 세화리 경주김씨 입도조 김검룡과 반득이 왓 입도 4세 김자신 방묘, 산세미 오름 傳김수장군 방묘, 묘산봉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 부부 방묘가 있다.

  
비석 또한 화강석에 하엽형(荷葉形)이기에 이 하협형은 조선 초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고조기 무덤 좌측에 세워진 연꽃 모양의 비석은 화강석이기 때문에 제주에서 볼 수 없는 비석이다. 이런 비석이나 석상이 여말선초에 제주에 온 벼슬아치들의 무덤에 많이 보인다. 제주의 무덤에서 주목할 것은 문인석이다. 육지에서 반장할 때 가지고 온 화강석 문인석은 고려시대 복식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당연히 송나라 복식제도를 모방했다. 그래서 고려시대 문인석은 복두 공복상이고 석상에도 그대로 새겼다. 제주의 문인석이 모두 고려시대 복두공복상을 따르고 있는 것은 여말선초 제주에 입도한 석상 양식을 따랐으므로 조선시대에 제주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 조선시대 초기에 유행한 하형협 비석.

▲민심의 향방에 따르는 문화


어떤 문명이든 문화는 일방적으로 전파했다고 성공적으로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문화가 지역 내부로부터 필요 때문에 받아들여질 때 새롭게 문화적 기운이 탄생한다. 어떤 문화는 급작스럽게 유행하다가 자연히 사라지고 어떤 문화는 탄압을 해도 오랜 불씨가 돼 지역 전체로 확산된다. 전승되지 못하는 문화는 강제로 외부의 기운을 업고 제도적으로 배제할 때 사라지지만 또, 그것이 민중들의 힘으로 지켜지게 되면 질기게 살아남는다.


제도는 국가의 사상적, 혹은 경제적 목표에 따라 고쳐지거나 달라지기도 한다. 이 제도가 어떤 의미로 정착돼는 지는 전적으로 민심의 향방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문화도 없고, 변하지 않는 문화도 없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옹호되거나 배척되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보존되고 전승되는 문화는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검증되느냐, 그래서 과연 그 실천이 민중들의 삶에 이로운가, 아닌가에 존속 여부가 달렸다.  


제주에 복두공복상의 문인석이 전승된 이유도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시대가 바뀌면서 송나라의 성리학이 조선에 정착되고 무덤의 제도가 되살아났기 때문에 석상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제주는 바다 건너 변방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 번 받아들인 문화는 토착화돼 오래도록 쉽게 바뀌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제주가 오늘날 인문학의 보고(寶庫)란 말은 지역의 고립성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빠른 개방화는 기껏 지켜온 문화자원이 사이비 관광자원으로 변질되는 악영향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백나용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