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가 좋다
나는 바다가 좋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송영미/수필가

오늘도 바다를 바라본다. 물빛이 곱다. 썰물 때여서 반쯤 채워진 바닷물은 하얀 모래 때문일까, 옥빛이다. 마실 나가시려 단장한 어머니의 옥색 치마폭처럼 감겨온다. 문득,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던 감촉을 떠 올려본다. 편안하다.


바람이 새기고 간 잔 물결을 볼 때면 바다가 리듬을 타는 듯하다. 잘 풀리지 않아서 갑갑하던 나날, 건조하던 마음이 바다처럼 흥겨움에 빠져든다. 살 거 같다.


가끔은 잿빛의 바다를 만나기도 한다. 깊이 가라앉은 바다는 흩으러짐이 없는 선비처럼 침묵이다. 곧 비가 올지도 모르고 바람이 거세게 불지도 모른다는 암묵의 표시이다. 바다는 쏟아지는 비도 세찬 바람도 아랑곳없이 넉넉하다. 가끔 포말을 일으키며 소용돌이를 치지만 다시 잠잠해지며 어디론가 흘러 갈 뿐이다. 


흘러 가는 바다는 유순하여 어릴적 나에게는 만만한 놀이터였다. 얕은 곳에서 첨벙대며 놀다 어느 순간에 깊은데인 줄 모르고 허우적 댄 적이 있다. 하마터면 영영 물밖으로 못 나올뻔한 사건이다. 오빠가 급하게 물밖으로 꺼냈기에 위기를 모면 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바다는 경계지역이 되어 버렸다. 상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않아  서 물만 바라볼 뿐이다. 물빛이 검은 빛으로 보이는 날은 섬찟한 느낌이 들어 얼른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알 수 없는 것은 어디 바다 뿐이던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쉽게 믿어버리는 나는 사람들에게 많이 치인다. 선한 마음으로 호의를 보이면 상대는 나의 약점을 다 알아내어 어느 순간 돌변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설마,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질투라는 놈이 또아리를 틀고 그 마음 안에 들어 앉아서 작정하고 계획한 일인데 당할 수 밖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나는, 그저 아무 대적도 하지 않고 신께 기도만 드릴 뿐 혼자 견딘다. 이제는 사람도 조심스럽다. 차라리 혼자가 좋다.


허허로운 날, 바다로 간다. 때가 되면 스스로 채워지는 만조의 바다. 널다란 백사장이 물결로 덮히면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으로 가득찬다. 바다는 비웠다가 또 채우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바다처럼 자유롭고 싶지만 밀물처럼 내 안에 스르르 채워지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바둥거리는 나날속에 겨우 붙잡히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아직도 신기루 같은 것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 쫓아서 갈 수 밖에 없다. 꼭 이루고 싶은 마음 간절하고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니까. 어느 날 미완의 내 삶에 채워지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슬며시 비워내는 여유도 있으리라.


썰물의 바다가 여유롭다. 텅 빈 모래사장에 새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 아이들이 맨 발로 조개를 잡고 산책을 나온 가족들의 웃음소리로 가득이다. 또 다른 바다의 모습, 물빛 보다 더 고운 정경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차를 몰고 길을 나선다. 어디로 가려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두서없이 쓰는 편지처럼 저절로 가는 곳은 바닷가다.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 오래된 상처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가슴이 후련하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망각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그 파도를 볼 수가 없다. 비 내린 끝, 안개로 가리워진 바다는 무대 뒤로 사라진 연극처럼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다. 아스라이 숨어버린 바다는 많은 것들을 숨기고 2막에 올려 질 무대를 준비하는 듯 비장하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바다는 안개속에서 말을 아끼고 있다. 바다를 가만히 응시할 뿐, 머릿속에서만 대본을 써 보지만 바다의 깊은 적막은 아무것도 예견하지 말라한다. 아무리 걷어내려 하지만 안개에 싸인 바다는 신비로움 그 자체다. 이 시간이 지나고 활짝 개인날을 기다려야만 모든게 드러나는 바다. 저절로 낮아지는 마음을 배우고 신비의 바다를 깨우지 않으려 슬며시 돌아온다.


바닷가에서 낳고 자란 나는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바다가 늘 그립다. 삶이 풀리지 않을 때 뒤엉킨 실타래를 바다에 넣으면 두둥실 파도에 넘실대며 스르르 풀린다. 바다는 많은 말들을 들려 주어 나를 꿈꾸게 한다. 일장춘몽이 되어버리는 허망한 꿈이 아닌 이룰 수 있다고 확신을 주는 고마운 바다. 바다는 늘 돌아가야 하는 나의 본향이다. 나는 바다가 좋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