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았다. 뉴질랜드에 이주하고 나서 처음이니까 20년 만이다.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오지 못했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어도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슬퍼했을 뿐이다. 지리적 거리감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멀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런 거리감은 가끔 38세 때 폐결핵으로 요절한 20세기 초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고향에 다시 가지 못한다는 건 때로 형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벼르던 일이라 모든 걸 제쳐놓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언이라도 하듯 한국에 다니러 간다는 얘기부터 했다. 10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면 다녀올 수 있는 곳을 20년 만에 간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한국의 공기가 미세 먼지 등으로 뒤덮여 숨이 막힐 거라며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스크부터 사서 써야 한다고 했다. 이국땅에서 좀처럼 맛 볼 수 없는 음식들이 도처에 깔렸으니 마음껏 즐기고 오라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이든 제주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알아 볼 수 없을 거라며 놀라지 말라는 말도 해주었다. 같은 고향 출신의 한 외교관은 비행기가 제주 공항에 착륙할 때쯤이면 눈물이 날 것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한국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울의 하늘에선 푸른빛이 자취를 감추었고 콘크리트 빌딩들은 더 높아져 있었다. 미세 먼지가 얼마나 섞여 있는지는 모르지만 공기도 텁텁했다. 산업시설이 거의 없는 뉴질랜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도 많았고 먹거리도 정말 넘쳐날 지경이었다. 서울에서는 길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년 전의 흔적은 어디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도 변해 있었다. 악수를 나누면서 하나도 안 변했다고 덕담을 건네 보지만 두 눈은 옛날의 흔적을 찾기에 바빴다. 누구는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여 있었고 누구는 세월의 무게에 어깨가 무너져 내릴 듯 내려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흘러가지만 그토록 준엄한 것이다.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처럼 절대 봐주지 않는다.

그래도 고향은 좋았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길을 잃을 만큼 거리가 달라지고 자동차가 많아졌지만 고향이라는 단순 소박한 말이 모든 감정을 하나로 정리해주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흙냄새도 좋았고 풀과 나무들도 좋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한라산도 좋았고 바다도 좋았다. 자신들의 일상을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가슴으로 안아주는 정 많은 사람들도 좋았다. 정말 눈물이 나게 했다. 고향이 주는 선물이었다. 병마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보는 아픔까지도 서로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오는 따스함으로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고향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파워베이스가 돼준다. 이 세상 어디에 살던 고향과 가족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뿌리가 든든하다. 그리고 고향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은 뿌리를 잃은 나무와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20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새삼스럽게 느낀 건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도 자신이 자란 고향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