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객에서 여행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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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란.

제주살이에선 예상치 못한 손님맞이가 아주 큰 재미다.

일상객으로 여행객을 맞는 격인데 느닷없이 날아든 약속에 번번이 주객전도가 되곤 한다. 지난 주엔 여고 동창 부부가 어렵사리 제주를 찾았다. 세세한 여행 준비 티가 역력한 그들은 자본주의 현역 부부의 전형을 드러냈다.

그에 걸맞은 숙소인 서귀포 호텔로 향하는 산록도로는 눈부신 초록 길이다. 거한 저녁도 얻어 먹었으니 이 또한 주객전도가 아닌가? 다음 날 성산 일출봉에서 합류하자며 헤어졌다.

‘몇 년 전엔 말로만 성게미역국을 끓였으니 올핸 성게를 듬뿍 넣어 끓여야겠다.’ 반찬 구상으로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전화벨 소리가 차갑다.

“작은아들이 사라졌대! 어제 뜬눈으로 꼬박 새우고 겨우 비행기표를 구했어! 내 팔자에 여행은 무슨.”

평소 바르고 잘 웃는 그녀답지 않은 탄식조 목소리가 명치 끝에 걸린다. 그들은 2박 3일 여정 중 단 하룻밤도 여행객이 못 된 채 엄격한 일상으로 황망하게 돌아갔다. 우수한 큰아들과 자폐 작은아들을 둔 친구에게 위로할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제도적 뒷받침이 전무한 자폐아 돌 봄은 오로지 부모 부담인 현실이 확실한 통계조차 잡히지 않아 사회적 시스템 작동은 요원하다.

걱정 마! 별일 없을테니. 이미 꺼진 폰에 혼잣말을 되뇌며 미안하단 말조차 못 했다. 동년배임에도 확연히 다른 일상을 실감했으므로….

어느 날은 단체 여행 일정을 마치고 비행 시간까지 바꿔 만남을 준비했다는 지인이 있었다. 비행 시간까지 5시간 여유라니 효용성 극대화가 필요했다. 서울살이 시절 삶의 가치 기준을 가늠하는데 꽤 유용했던 효용 가치가 슬그머니 후 순위로 밀려난 즈음이었다. 만남 성사 여부엔 남편 도움이 절대적 우위 등극이다.

1안, 2안, 남편의 일방적 제안을 경청했건만 시큰둥한 반응을 탓하던 그는 결국 파국 결말을 내놨다. 이번 만남은 서로 힘들 것이 뻔하니 다음으로 미루자!

이에 남편에게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았는데 그만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기쁘지 않으니 힘듦이 우선하는 거예요!” “맞아! 난 사람 만나는 게 기쁘지 않은가 봐!”

유난히 고단했을 하루를 격려하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걸…. 어둠에 갇힌 남편 거처인 별관 사이로 흐르는 별빛이 유난히 다정하다.

다음 날 아침 밤사이 허물어졌던 감정은 말끔히 복원됐다.

부부살이 40년 결과물로 1안과 2안을 잘 버무려 만남은 성사되었다.

은퇴 후 제주살이를 마냥 부러워하는 지인과 봄꽃 만발한 마당에서 사진도 찍고 저녁을 서로 낸다고 다툴 만큼 따뜻한 만남이었다. 제주살이 찬가라도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십 년의 긴 시간 사이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던 인연의 샘물을 나눠 마시고 언제인지 모를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소중한 인연을 공항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낮과 밤을 가르는 신비한 경계가 유월의 신록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점점이 번지는 수묵화의 무게가 시야로 겹치며 자동차 오디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케스트라 선율이 질주하는 비자림로는 환상 그 이상이었다.

질서 정연한 일상 중 간간히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이벤트가 꼭 손님 다녀간 후에만 이뤄짐에도 매번 감격할 뿐 일회성에 그치곤 만다.

그럼에도 어떤 여행객들의 찰나적 희열을 넘을 수 있을까? 일상과 여행을 선회하는 지금이야말로 최고 정점인 바로 그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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