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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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수필자

비가 내린다. 차창 위로 흐르는 빗물은 초록과 갈색이 서로 섞이면서 숲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차 안에는 첼로의 차분한 음색에 실려 ‘쟈클린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천천히 가야 해….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 차를 피해 길옆으로 세운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는 제법 세차게 내렸고 이른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첫 수필집 출간을 앞두고 찾아간 출판사에서의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어, 그사이 짓누르던 걱정거리도 사라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핸들을 잡았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지나온 시간을 가지런히 빗질하며 토닥였다.


비 내리는 날의 5·16도로는 급회전 구간이 많아 위험부담은 있지만, 비에 젖은 숲의 운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빠져들고 싶은 풍경이다. 게다가 길옆에 차를 세우고 한 컷의 풍경을 수묵화의 느낌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더해 이 길로 고집스레 다닌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차라곤 보이지 않았다. 숲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죽이며 완만하게 휘어진 길을 돌 때였다. 한순간,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바닥을 훑는 바퀴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며 몸이 떨렸다. 차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데 심장이 방망이질하며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남자가 손짓하며 내 차 앞으로 걸어왔다.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어 가까스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측 차로를 달리던 내 차가 미끄러지면서 한 바퀴를 돌아 중앙선을 넘었고 좌측차로에서 달려오던 차가 내 차의 뒤쪽을 들이받은 상태였다. 중형차와 경차의 충돌은 참혹했다. 상대방의 중형차는 멀쩡한데 내 차는 뒤쪽 유리창이 깨지면서 날아갔고, 트렁크는 뒷좌석을 밀며 안쪽으로 찌그러져 들어갔다. 트렁크 안에 들어 있던 책과 소지품들이 비 내리는 길 위로 쏟아져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속도를 줄여서 왔기에 차는 볼품없이 찌그러졌어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교통경찰이 왔다. 얼마 전에도 이 길에서 사고가 났었다며 과속을 했냐고 슬쩍 묻는다. 교통사고 상습지역으로 통하는 도로에서 사고가 난 건 과속 때문이라 여기는 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비는 하염없이 내렸고, 보험사 직원을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하게 흘렀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가족들의 걱정은 뜻밖에 컸다. 어쩌다 동승을 할라치면 조수석에 앉아 하지 말라는 건 왜 그리도 많은지 은근히 화가 날 때도 적잖았다. 좋은 소리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잔소리로 들리기 십상 아닌가. 무엇보다 사람은 말투 하나에도 인격이 보인다는 그이는 운전 중에 나도 모르게 내뱉는 욕이 듣기 싫다고 침묵으로 시위하며 조심시켰다. 가족의 열렬한 충고 덕분인지 큰 탈 없이 다녔으나 아무런 예고 없이 맞닥뜨리는 게 또한 교통사고였다.


한때 허점투성이인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평탄하게 운전하며 사는 이들에겐 그들만이 빚어낸 삶에 대한 기준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방법을 찾으려고 한동안 서점가를 휩쓸었던 습관에 대한 지침서를 탐독했었다. 그렇다고 사는 게 쉬워진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그들이 터득한 삶의 길이 있었고, 나에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다. 엎어지고 상처를 입고 치유하면서 나의 그릇에 담을 만큼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걸었고 내리막길이나 구부러진 길도 걸었다. 풀썩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는 잠시 쉬며 기다렸고, 때로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찾았다.


사고가 난 지 사십여 일이 지났다. 내 차는 아직도 수리 중이고, 렌터카를 타고 다니면서도 여전히 이 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다닌다. ‘허’ 자로 시작하는 번호판 때문인지 가는 길을 비키라고 바짝 뒤따라 붙는 차들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무시한 채 앞서갔겠지만, 끔찍한 사고는 양보의 소중함을 남겼다.


추월하려는 차를 피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비장하게 흐르는 ‘쟈클린의 눈물’도 거의 그쳐가고 있다. 차창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들. 도착지는 정해져 있는데 저리 서두를 까닭이 무언가. 사고 나던 날 나도 저렇게 달렸나 싶어 오금이 저린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미련한 운전자. 만약에 운전석과 정면충돌했더라면…, 이렇게 구차한 변명이나마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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