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자치 활동(1947년~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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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흡.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요즘의 청년 활동은 주로 학생 활동이요, 성인들보다 현대적이고 모범적이다. 이는 민주 자치의 진수眞髓라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한말韓末까지는 유생儒生들의 활동이며 봉건적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주로 황민화皇民化의 시대이니 학생 활동은 철저히 획일화를 강요했다. 오직 올곧은 항일抗日 학생 운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전국은 환희로 가득 찼다. 친북親北 좌파左派의 민청民靑(뒤의 民愛靑)의 독무대여서 민족주의의 항일 활동은 주눅 든 상태였다.

나는 1947년 제주농업중학교의 신입생으로서 5년 선배 전창규全昌圭(삼도 ‘무근-성’)를 보았고 그는 첫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1946년 6월 25일 제농濟農 4년 졸업과 동시에 학제가 6년제로 승격하니, 46명과 함께 1948년 7월 10일 6년제 제1회(延37회)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수재였는데 1950년 6·25 이후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준수한 얼굴에 예리한 눈동자가 돋보여 기억에 남아 있다.

나의 소장품인 당시의 <제주신문 축쇄판縮刷版>에 전창규의 ‘남로당 탈당 성명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보다 1년 뒤의 김호산金浩山이 제2대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전국 학련學聯 제주도 위원장이었다. 좌파 민청 척결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미 지면知面이 있던 초대 국회의원 김인선金仁善(신엄)의 동문 밖 자택을 찾아 갔다. 나에게 김인선은 “당시 제농 학생들은 거개擧皆 남로당의 비밀 당원이거나, 그 외곽 단체인 민애청民愛靑 당원이다. 호산의 친형인 호선浩仙과 함께 호산을 설득시켜 전향轉向시겼다.”라는 설명이다. 김호산은 36명과 함께 졸업한 제2회(延38회) 출신이다.

1948년 불운한 4·3을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초대 안호상安浩相 문교부장관은 모든 학생 단체를 학도호국단에 통합시켰다. 그 후 호국단(단장: 교장 崔光植) 학생들은 송봉규宋奉圭를 제1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송봉규(한림리)는 곧 나의 3년 선배로서 논리정연하고 구령 소리는 우렁찼다. 동기생 45명과 함께 1950년 5월 2일 졸업하고 바로 성균관대학 정치과에 진학했던 것이다.

한 달 지나 6·25 전쟁이 일어났으며, 제2대 호국단護國團 학생회장은 고남화高南化(애월리)였다. 동기생 99명은 육군과 해병대 4기로 전원 지원병으로 출정, 대학에 지원자가 없는 진기록을 남긴 동창이다.

고남화는 夫婦부부 대령으로 전선에서 명성을 날렸다. 지난 4월 삼성혈에서 만나 나의 뜻에 따라 그가 소지한 전쟁유품을 전부 제주교육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는 최 교육감의 유품 기증에 이은 쾌거였다.

1952년 학제 개편으로 모교는 제주농고와 제주일중으로 나뉘었다. 초대 학생회장은 김석범金錫範(삼도: 도 교육위원), 이어 서성옥徐成玉(추자: 중등교장), 이때는 자율적 입후보 제도가 없어, 학교 당국에서 농과 실장 김찬흡과 축산과 실장 서성옥을 입후보해 전교 학생 대의원을 모아 비밀 투표하도록 했다. 이어 손병식孫柄植(우도: 早夭), 백우현白于玹(애월읍 소길, 특허 발명왕)이 학생회장을 역임했으며, 백우현은 현재 서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물론 제주 성내에 오현고, 제주사범, 제주여고, 그리고 서귀농고를 비롯해 각 읍면 소재지에 각 고등학교가 우후죽순 개교했고, 각기 독특한 학생 자치 활동은 오늘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지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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