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예쁘다.


삼월의 바람과 사월의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면, 오월은 붉은 장미를 피워내고, 햇살은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낸다. 오월의 바람 속에는 온갖 꽃 향이 실려 있다. 활짝 핀 꽃들과 초목들은 계절의 여왕답게 온 천지에 베일을 드리우며 초록 물결을 이룬다.

 

우리 집 화단 한쪽에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겨울이 가고 훈풍이 불어오면 무채색의 감나무 가지에도 연둣빛 새 생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볕을 쐬러 나온다. 어느 해인지, 씨에서 돋아난 이 감나무는 작년에 처음으로 감이 스무 개쯤 열렸었다. 그 작은 열매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더니 가을이 채 이울기도 전에 거의 다 떨어지고 말아 겨우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 하나 남은 감은 끝까지 나뭇가지를 붙잡고 홍시가 될 때까지 단맛을 다 채우고 나서, 새들에게 마지막 보시를 하고 생을 마감하는 숭고함도 보였다.

 

지난 이월엔, 비바람 눈보라 다 이겨내고 백목련이 우아하게 봉우리를 내밀어, 학처럼 고고한 자태로 당당하게 봄을 몰고 왔다. 이어서 매화꽃이 피고, 첫사랑을 닮은 복사꽃도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에 질세라 연분홍 벚꽃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천지 사방에서 꽃 잔치를 벌였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형벌이 화형火刑이라 했던가. 꽃그늘 아래서 그 황홀을 탐닉할 여유도 없이 봄비 몇 차례에 꽃들은 하르르 하르르 꽃비 되어 흩날리고 말았다. 다시 사월이 오면 제주 섬은 온통 노란 물감으로 채색되어 수많은 상춘객을 불러들이곤 했다.

 

봄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어느 날, 남편이 “이리 와봐” 하는 소리에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이는 감나무를 가리키며 “저게 감인가?” 한다. “무슨 소리?” 하며 감나무를 쳐다보았다. 내 키보다 한 자쯤이나 더 될까. 감나무에는 열매인지 꽃인지 작은 콩알만 한 것들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어느새!’ 반들거리는 잎 새들 틈새에 오종종하니 귀여운 것들이 “나 좀 보셔요, 나도 여기 있어요.” 하는 듯이 보였다. 이 아침,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나는 감나무에서 삶의 희열을 보았다.


아픔 없는 탄생이 어디 있으랴. 저 작은 것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자연은 또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었을까. 살며시 감나무를 어루만져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사이클이 놀라울 뿐이다. 어젯밤은 잠을 설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신이 축 처져 있었는데 오늘 아침 이 감나무가, 우주의 시어詩語들을 마구 쏟아내며 무정 설법을 하고 있다. 저들이 전하는 설법의 심오함을 내 정녕 알 수는 없지만, 우주의 기운이 내 몸 안으로 확 퍼지며 닫혔던 내부로부터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조석으로 바뀌는 어린애 심성도 아닐 진데, ‘이 무슨 변고람.’ 참으로 신선한 충격에 내 몸은 하늘 위로 붕~뜬 기분이었다. 작은 감나무의 행위 하나에 이렇게도 내 기분이 달라질 수가 있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목으로 서 있던 저 감나무는 연둣빛 움이 겨우 눈을 열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감을 참 좋아한다. 빛깔은 또 얼마나 고운지. 하루 일과를 마친 태양이 서쪽 바다로 스러지면서 뿜어내는 노을빛 황홀은 감빛과도 닮았다.


이제 꽃이 피고 나면 저 작은 열매들은 여름내 뜨거운 태양을 어떻게 견뎌낼까. 그래도 밤이 되면 달과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알차게 영글어 가겠지. 그리고 홍시가 될 때까지 단맛으로 곱게 익혀 또 뭇 새들을 불러들일 터.

 

태양의 눈에는 이 지구가 잘 가꾸어진 하나의 정원이라 하지 않던가.


자세를 낮추면 보이지 않던 세상이 널려 있는데 그동안 큰 것에만 눈을 돌리지 않았나 싶다. 작은 것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자라고 있는 것을.


어느새 그 찬란한 오월의 광휘光輝도 아름다운 초록의 경계를 넘어 서려 하고 있다. 가슴 아린 감미로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봄날들이 또 그렇게 흘러만 간다. 

 

5월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