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함께 가는 인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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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 초빙교수/논설위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은 누구였나?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스승을 찾아가보자. 그러면 스승과의 추억을 넘어서 스스로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렌스 스타인버그의 이 권고가 아니어도 오늘은 문득 선생님을 찾아가 보고픈 날이다. 스승의 날이 아닌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제주시에서 전근오신 선생님이 아이들을 유독 아껴주셨다. 어떻게 이토록 예쁠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손을 어루만지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셨다. 하루는 일기장을 검사하신 후 샘플 하나를 낭독하셨다. ‘선생님의 빨간 몽둥이가 교탁을 탁탁 치면 내 가슴은 쿵쿵 뛴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부터 그 무서운 몽둥이가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왜 그토록 아끼시던 몽둥이를 버리셨는지 물어보았다. “첫눈에 네가 가장 인상적으로 보였단다. 어린아이 답지 않게 손이 많이 거칠었고 옷에도 흙이 잔뜩 묻어 있었지. 마치 벌판을 달려오는 것 같은 네게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싶더구나.”

그 당시 우리 대포동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밭으로 갔다가 학교 종이 울리면 교실로 달려가고, 수업이 끝나면 마파람처럼 다시 밭고랑으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오신 선생님 눈에 우리는 노동현장에 투입된 어린 노동자들 같았다. 그래서 생애 최초로 받은 선행상이 선생님의 인생 격려사임을 알게 된 아이는, 세상을 더 착실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던 아이를 불러서 선생님께서 진지하게 물으셨다. “너, 곤밥(쌀밥) 실컷 먹고 싶지 않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한 가지를 제안하셨다. ‘방과 후에 열심히 책읽기를 해보라’고. 선생님이 주신 신약성경, 불교설화, 보물섬 등은 집에서 뒹구는 새농민이나 제주신문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아이는 책 읽는 일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공부하는 기쁨으로 이어졌다.

몇 달 후 독후감 대회가 열렸고, 아이는 난생 처음 서울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먹구름 너머로 해님이 빛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신비였다. 그 비밀을 품고 돌아온 아이에게 선생님은 공교롭게도 ‘태양처럼 언제나 밝은 꿈을 가지라’고 당부하셨다. 인생의 절망 앞에서 무릎 꿇고 싶을 때마다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하늘나라로 가신 선생님이 구름 너머에서 해처럼 밝게 웃어주셨다. ‘이 비 그치면 꽃 필 차례가 네 앞에 있다’시면서. 아이는 다시 더 희망차게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오늘은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대학 갈 형편이 못돼서 들어간 실업학교에서 대학의 문을 열어주신 선생님이다. 주산·부기·타자가 주요과목인 학교에서 대학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국어·영어·수학을 보충해 주셨다. ‘장밋빛 꿈을 꾸며 공부의 열정을 불태우라’고 우리들을 ‘장미’라 부르셨다. 아이들은 실업계와 인문계를 넘나들며 두 마리 토끼를 열심히 키웠다. 대학 진학률이 20∼30%이던 시절의 얘기다. 이제는 팔순을 넘기신 선생님과 함께 인생길을 걷는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비로소 알 것 같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고, 네가 싫으면 나도 싫다’는 선생님의 믿음 그대로가 되어보고저.

소중한 스승들을 추억해 보니, 인생의 중요한 시점도 이제는 알 듯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어렸을 적,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선생님이 계셔서 부끄럽지 않았던 시간들. 인생은 더 착실하게, 좀 더 희망차게, 더욱 더 열정적으로 살아갈 일이다.

스승과 함께 가는 인생이라면, 나의 이 부끄러운 고백이 어느 누군가의 추억이 되기를 빌어본다. 그리하여 오늘 같은 날 그 스승을 찾아가서 추억 너머의 자기와 조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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