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토머리, 얼었던 땅이 풀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을까. 수년 전, 대정읍성 동문 바로 안쪽 추사 선생 적거지를 찾은 날에 지적지적 비가 뿌렸다. 선생이 묵었던 방이 손바닥만 했다. 감기처럼 한기가 엄습해 몸이 으슬으슬했다. 세 평에 찰까. 홀연히 가슴이 답답해 왔다. 긴 세월을 작은 방에 닫힌 채, 울울한 심사를 어찌했을꼬.
산은 저만치 나앉았고 묵묵히 내려앉은 하늘의 정적(靜寂), 귀를 틀어막아도 가까이서 철석이며 달려들었을 바다의 시퍼런 숨결. 선생은 쉰다섯에 유배돼 9년 동안을 저 작은 방에 갇혀 살았구나. 산이고 싶어도 될 일이 아닌 것이며, 내려앉은 하늘이 쇳덩이로 짓눌렀을 테다. 섬의 물결 소리에 밤마다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 들어 뒤척였으리라.
귓전으로 선생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했다. 유배의 절망감, 상처(喪妻) 속 비탄과 뼈저린 절해고도의 고독 속에서 그렇게 〈세한도歲寒圖〉는 태어났다. 속울음에 한을 토해내듯 명작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는 지남철에 끌린 듯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해 한동안 언저리에 말뚝처럼 선 채 멈춰 있었다. 선생에게 작은 방이 한 세계로 열려 있었을까.
도산서원도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다. 퇴계 선생이 머물던 방을 보고 싶어서다. 학문을 떠나 그분의 남다른 삶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 아닌가. 생활이 검소해 세숫대야는 질그릇을 사용하고, 방엔 평소 부들자리를 깔고 지냈다 한다.
한번은 영천 군수 허 시(許時)가 “이렇게 비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고 물으니, “오랫동안 버릇이 돼 있어 어려운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선생은 겸허를 덕으로 삼아 털끝만큼도 거만함이 없었다고 전해 온다.
오직 학문 탐구와 제자 양성에 뜻을 두었으니, 문하(門下)에 제자 368명을 거느렸음이 예삿일이 아니다. 한석봉이 쓴 도산서당 편액이 율곡 선생이 찾아와 사흘을 머묾으로써 더욱 빛났지 않았을까.
방 가운데 서북쪽 벽에 서가를 만들고 서면은 격장을 두어 반은 침실을 내었으며, 고서 천여 권을 좌우 서가에 나눠 꽂았다 한다. 매화분 한 개, 책상과 연갑 각각 하나, 지팡이 한 개, 침구·돗자리, 향로, 혼천의(渾天儀)를 두었다던가. 남벽 상면에는 시렁을 가로질러 옷상자와 서류 넣는 부담상자를 두고, 다른 물건은 없다는 것. 이 암서헌(巖棲軒)은 고작 삼간에 불과하다. 작은 공간을 크고 넓게 쓴 어른이었다.
초가삼간으로 하면 세종임금을 빼놓지 못한다. 왕께서는 경회루 동편에 쓰다 남은 재목으로 별채를 지었다. 돌 주추도 쓰지 않고 지붕도 짚으로 이어 간소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노상 그 집에서 검소하게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 초가 별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골몰하셨다. 바로 거룩한 우리 한글의 산실이었다. 작은 방에서 세계적인 문자가 태어났은즉 어찌 ‘작은 방’이라 하랴.
<세한도〉가 탄생하고〈도산12곡〉이 울려나오고 위대한 한글이 태어난 곳은 아주 작은 한 칸의 방이었다.
나는 읍내 조그만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 방 셋 중 둘을 서재로 내주었다. 읽고 쓰는 방이 크진 않으나 다섯 평은 될 것이라, 작은 방이 아니다. 책상 하나, 간이서가 둘에 붙박이장과 수납장, 침대가 들어서 있다.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 때는 동창을 열어 바깥 나무들을 안으로 들인다. 방 안에 또 한세상을 펼치니 크고 넓어 부러울 게 없다.
간혹 작다고 투덜대다, 추사와 퇴계 선생과 세종임금을 떠올리며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인제 뭘 좀 깨달아 간다.
‘작은 방이 성지(聖地)’인 것을.
김길웅. 칼럼니스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