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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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호/시조시인

지난 14일 제주작가회의가 주최한 4·3 문학 기행에 동행했다. 안내 책자엔 소설 ‘화산도’를 쓴 재일 동포 김석범 작가를 제재로 한 시 “나는/ 남쪽 사람도 북쪽 사람도 아니요/ 그러니까 나는 무국자요/ 나는/ 분단 이전 조선 사람이요// 제주 4·3도 마찬가지요/ 반 토막 4·3은 4·3이 아니란 말이요/ 온전한 4·3은/ 통일된 조국에서의 4·3이요/ 그러니 제주 4·3은 곧 통일인 거요// 4·3을 한다는 거?/ 저기, 저, 백비, 저걸 일으켜 세우는 거요”(김수열의 시 ‘경계의 사람-김석범’)를 읽고, 이번 4·3 문학기행의 슬로건 ‘저 백비, 일어서는 날까지’ 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먼저 오림반으로 갔다. 제1횡단도로 성판악휴게소에서 4㎞쯤 내려가서 왼쪽으로 200m 숲으로 들어가니 축구장보다 넓은 곳이 나타났다. 주변에 동수악, 이승악, 논고악 등이 형성된 천혜의 요새다. 여기에서 죽창과 몽둥이를 갖고 무장대들이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억새와 솔비나무를 비롯한 잡목들만 자라고 있다.

 

다음은 남원읍 신례리 수악주둔소로 갔다. 숲속을 한 참 걸어야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잡목으로 시야가 막혀버렸지만 당시엔 주변을 조망하기가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고 한다. 250여 평 남짓 돌로 쌓은 외성과 내성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신례리, 하례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또한 모든 물자를 나르는 일도 농사짓기도 바쁜 주민들이 맡아 했다고 한다. 같은 마을에 토벌대와 무장대, 생각만 해도 섬쩍지근했다.

 

오후엔 예촌(禮村)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 신례리로 갔다. 이곳은 4·3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본 곳으로 신고 된 희생자만도 78명에 이른다. 생생한 증언을 듣기 위해 양금석(전 도의원) 선생을 만났다. 선생의 아버지 양을 검사는 당시 근무할 때 4·3으로 체포된 민간인들을 많이 풀어줬다고 했다.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경찰에 체포 구금 모진 고문 끝에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다 돌아가셨다고 증언을 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이제 어떻게 화해와 상생의 꽃을 피울 것인가?

 

내년이 4·3 70주년이다.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과거청산과 정의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지난 8일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4·3의 진정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사업 성취, 평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도민들의 적극적인 이해와 동참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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