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문학 40년, 성찰과 출구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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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준 한국문인협회 이사 작가/논설위원

제주 사람들은 4·3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했던 적이 있다. 특히 그 사건을 겪은 분들은 4·3이라는 말만 꺼내도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인다. 필자가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몸서리를 쳤다.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잘못된 사회인식 때문이었다. 무장대에게 당한 이야기는 무용담처럼 이야기 하지만 토벌대에게 당한 유족들은 발설도 못하고 속만 끓였다. 한동안 4·3은 좌익 빨갱이가 저지른 폭동이라는 정부의 호도로 전후세대들은 그렇게 교육받았다. 사회가 개방화되고 민주화와 시민정신이 싹 트고 4·3에 대한 많은 담론이 이어지면서 정부가 사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4·3을 세상에 드러내 공론화 하게 된 데는 문학이 힘이 컸다.

4·3을 처음 문학 작품으로 발표한 것은 김석범이다. 그는 1976년 일본에서 문학계에 ‘화산도’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연재 했으나 국내에 알려진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다.

국내에서 4·3을 문학 작품으로 발표한 것은 현기영이 시초였다. 현기영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순이삼촌’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4·3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군사 정권에서 많은 수모를 겪었다. 이후 이 땅의 문인들은 후손으로서의 부채를 진 것처럼 모든 장르에서 다양한 형태로 4·3을 노래하고 작품을 발표했다. 4·3 문학은 또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되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를 하는데 매년 전국의 수 백 명의 청소년들이 여기에 참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국내 최고의 상금을 내걸고 제주4·3평화문학상을 공모하면서 전국의 패기 있는 문학도들이 시와 소설 작품을 보내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광주 5·18에 비하면 아직도 4·3을 모르는 이가 많다. 공산 폭도들에 의한 무장 봉기에서 공권력에 의한 도민의 희생으로 규정 된 것이 불과 10여 년 전 노무현 정부 때였고 국가 추념일로 지정된 것이 2014년이다. 그러나 화합과 상생,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추념식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겉으로는 4·3희생자와 우익 단체들이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4·3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인식의 간극은 크다. 진상규명과 배·보상의 문제 역시 난감한 사안이며 진정한 화해의 방법 역시 숙원 과제다.

여기에 4·3문학의 과제가 남는다. 4·3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 문학인 것처럼 치유와 해결 방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문학의 책무다. 선배 문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후배 문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과거의 원한과 희생을 이야기 했다면 이제 진정한 상생과 화해의 방법을 모색할 때다. 60여 년을 이념에 따라 편 가르고 손가락질했다면 이제 두 손 맞잡을 방안을 이야기할 때다. 4·3의 정신을 문학을 통해 규명하고 계승하는 것도 문학인의 몫이다.

최근 그간의 4·3문학에 관한 작품을 정리한 평론집이 나왔다. 이전에도 두 권의 저서를 발간하면서 4·3문학에 천착해왔던 제주의 평론가 김동윤은 ‘작은 섬 큰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4·3문학 작품들에 대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제주4·3문제를 오키나와 문학에서 해법을 찾고 싶다면서 조심스럽게 4·3문학의 세계화 방안에 접근하고 있다. 결국 4·3문학의 미래는 이념적 대립의 가치가 아니라 평화와 인권이라는 세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

내년이면 4·3도 고희를 맞고 4·3문학은 40주년을 맞는다. 아직도 4·3이냐는 세간의 비아냥에서 문학이 출구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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