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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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봄은 지천에 깔렸다. 가는 곳곳 발에 밟히고, 눈에 든다. 고향 가는 길 둔덕에도 이름 모를 꽃들을 피워 나를 반기고, 울담 안의 초목들도 신록을 뿜어댄다. 들녘은 그야말로 봄꽃들의 색과 향으로 야단이다. 노루귀, 앵초, 노랑제비꽃, 애기똥풀, 각시붓꽃…. 이름만큼이나 깜찍한 들꽃들의 저 요란한 교태라니!

그러고 보니 지난 이맘 때 유채꽃 흐드러지게 핀 남도의 해변 길을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갯냄새와 꽃향기가 봄의 시구들을 일깨웠다. 언덕 마루 들녘은 봄나물 뜯는 아낙들로 점점이 꽃수가 놓이고. 사방은 온통 봄의 정기로 들어찼었다.

지금쯤 우리의 해안이나 산과 들은 봄의 향연에 들썩인다. 태곳적 숨결 이어 나르는 파도 소리와 산과 들에 피어오르는 들나물 산채들의 맛과 향. 보고, 듣고, 맛보고 싶은 욕망에 마음은 벌써 어디론가 내달린다. 해물 맛으로 이름난 남도의 어느 섬으로, 꽃이나 산나물 축제가 열리는 산마을 꽃동네로….

여행은 낯선 시·공간을 향해 떠나는 것이라고는 하나 희미한 추억 한 조각 묻어둔 그곳이면 어떠랴. 일상을 잠시 유보해놓고 나들이처럼 훌쩍 떠나면 된다. 여행의 달콤한 유혹 속으로 서슴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오는 듯 가버리는 봄이 잠깐 머물러 있는 동안 삶의 둥지를 바꾸듯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저들은 이곳으로 오고. 그렇다고 삶의 공간을 바꾸면 여행의 욕구가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삶은 머잖아 낯선 공간을 익숙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 다시 새로움을 찾아 떠나야 한다.

‘어느 아침에 우리는 떠난다. 머리는 열정의 불꽃으로 가득 차고 가슴은 원한과 쓸쓸한 욕망에 부풀어 올라, 그래서 우리는 간다, 물결의 리듬을 따라, 수평선이 보이는 유한한 바다 위에 무한한 우리의 마음을 어우르며…’ 샤를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여행은 인간 본성의 발로다. 오랜 원시생활의 동물적 유랑의 기억은 인간의 유전 형질에 고스란히 각인돼 전해진다. 첨단 문명과 문화에도 쉬 탈각되지 않는 야성이다. 익숙한 현실을 일탈하려는 것이나 사막이나 극지방 같은 험지에 도전하는 일들은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의 다른 상황들이다. 적절하게 채워나가야 할 인간 내면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렇다고 여행이 일상의 해방구는 아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진 순수한 자아로 세계와 사물을 마주하고, 낯선 만남을 통해 익숙한 현실을 새롭게 성찰하는 기회다. 찰나의 성찰이지만 굳어진 감각과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익숙했던 현실이 신기하리만치 낯설게 다가오고 삶은 초심으로 돌아간다. 무딘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지며 일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되살아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지금, 여기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자기방어 기제다.

황홀한 춘기에 펼쳐지는 색다른 삶의 풍경들이 진경의 파노라마처럼 시야에 어른거린다. 호기심의 갈증을 채우기 위한 마음이 그려내는 환상이다. 망설임 없이 떠나고 채워야 한다. 일탈의 해방감에서 얻은 자유와 호사는 추억이 돼 죽는 날까지 삶의 액세서리로 남는다.

그래도 봄 여행은 한 조각 춘몽처럼 짧고 산뜻해야 좋다. 간간이 챙겨먹는 간식이나 군것질처럼 아쉬움이 남는. 그래야 여행의 허기가 다시 찾아오면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다.

이 좋은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가슴 한 켜에 추억 한 조각 그려볼 일이다. 추억은 사랑보다 아름답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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