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비불사춘(春來非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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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봄, 분명코 봄은 왔다. 유채꽃과 벚꽃이 한창인 제주의 봄은 바람과 함께 육지를 향해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다. 그런데 체감의 봄은 아직 온 것 같지가 않다. 이는 마치 왕소군(王昭君)이 오랑캐 땅에 끌려가 원제(元帝)를 그리워하며 시로 남겼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과 다르지 않다. 봄이 왔어도 봄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뭔가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세월호 참사’ 등의 영향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겪어온 수많은 적폐들, 그리고 정경유착의 비리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에 설상가상으로 몰아닥친 경제불황까지 서민들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싫든 좋든 오는 5월 9일에는 대선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고민스럽다.

막스웨버는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다른 신체 부위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으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라고 설파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봄이 왔어도 마음이 편치 아니하면 봄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정치 역시 국민의 편안해야 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최종목적은 국민 행복이다. 그래서 아직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게티스버그에서 행해졌던 아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명연설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링컨이나 또 오바마와 같은 대통령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의인을 만나려면 우선 나부터 의인이 돼야 한다. 우리 유권자들의 양심적이고 현명한 선택에 의해 의로움은 탄생한다. 요즘 사회적 관심에 정의가 가장 우선순위로 부각된 데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물론 국민적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차피 정치는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의 울타리 안에서 전개되는 예술이다. 그 중심에 주인으로 국민들의 권리가 살아 있다면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어나게 하는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 정치인들의 수준이 아직 국민들의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탄식하는 사람들도 보았는데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정당정치의 특색 중의 하나가 개 인의사보다 당략적인 정책과 집단결정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이 숱한 외래의 침탈과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우리 대한민국의 내공을 나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국민들의 선택은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나 국민의당의 안철수, 바른정당의 유승민,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그리고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들 가운데 선택할 수밖에 없다. 뉘도 쌀이지만 뉘와 쌀은 현격한 차이가 있는 법이다. 굳이 제안을 한다면 반드시 능력과 도덕성만은 고려해야 된다는 점이다. 장기판에서 졸이 장군을 부를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생을 가리켜 “B(Birth:탄생)에서 D(Death:죽음)에 이르기까지 C(Choice:선택)이다”라고 말했다. 반드시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봄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언제나 와 있다. 내가 필요할 때 내 안에서 꺼내 쓰면 되는 것으로, 곧 춘래비불사춘(春來非不似春) 봄이 왔으니 봄 아닌 것이 아니네!” 봄은 이렇게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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