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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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선/수필가

한라산에 얼마나 많은 눈이 쌓였던가. 봄의 태동은 씨앗을 보듬는 가을낙엽의 이불에서 시작한다. 빙하기를 내린 산신령의 입김인가, 눈이 진눈깨비로 함박눈으로 한라기슭에 내려 숲이나 오름은 광목처럼 드넓게 펼쳐진 설원이 된다. 겨울 한복판에 야생 동백나무들이 무작위로 꽃송이들을 떨어뜨린다. 설원 위에 통째로 누운 붉은 동백꽃 송이는 한라산이 봄을 낳으려고 생리한 거라는 친한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렇게 나무들은 견디고 있으면 봄이 온다는 자연의 섭리를 알기에 3월의 제주는 다시금 봄기운으로 생동을 찾는다. 초겨울을 달래던 수선화, 얼음 궁전에서 봄기운을 전하던 매화, 하늘에서 피고 땅에서 피고 그리운 사람의 마음에서 피던 동백이 진 자리에 눈꽃의 답장처럼 목련 그 하얀 몸짓이 꿈인 양 돋아난다. 아직은 꽃샘추위로 서성이는 날씨를 견딘 덕인가, 목련의 얼굴엔 이슬이 맺혀있어 백조가 낳은 백란처럼 지금이라도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은 봄을 알리는 계절의 언약이다.


어느덧 3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병아리 털 같은 노란 유채 꽃 낭자하고, 움트는 복숭아나무에, 초저녁 별 같은 핑크빛 꽃봉오리가 돋아나고 있다. 꽃샘추위도 예년에 비해 줄어들고 따사로운 봄 날씨가 더 많아졌다. 경칩 춘분도 어느덧 지나 이제 완연한 봄이 전국으로 깔리고 있다.


월말이 되면 남쪽 나라 제주에서 벚꽃이 만발하기 시작하여 봄 길 따라 북상한다고 한다. 그동안 추위와 삶의 무게로 움 추렸던 사람들도, 모처럼 차려입고 상춘 나들이에 나설 것이다.


나도 상춘객이 되고 싶다. 작년 봄처럼 건강하면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혼자, 때로는 지인과 남해안을 비롯하여 전국을 유람할 생각이었다. 육지사는 아들 부부도 만나고 친척도 만나고 유명관광지를 돌아보면서 겨우내 쌓은 고독감과 우울증 같은 어리석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이 귀향하리라.
오래 살아서 맛본 시련이던가. 순리대로 차분히 보내오든 내 삶이 어느 날 갑자기 구급차가 와서 응급실로 태워간 날로부터 일상이 헝클어져 버렸다. 집을 비우고 장기 입원생활로 들어갔다. 오진으로 판정된 병환을 그대로 믿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천우신조로 재활에 매진하게 되어 오늘을 살고 있다.


지난봄에 발생한 병환의 과정을 돌이키면 오싹 겁이 난다. 어찌 되었든 조물주가 내게 지병을 재발하게 한 이유가 노익장을 과시하던 나에게 유념하라는 경고였다. 여생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가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진선미를 수행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뻔뻔스럽게 장단 맞추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에 비례하여 건강을 유지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육신이 노쇠해지는 고령, 원하지 않아도 병은 찾아온다. 그나마 천우신조로 팔순이 되어도 서툰 보행이 가능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인생길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구름 한 조각 스러짐이겠지만, 인간의 삶이 그만큼 덧없고 허무하기에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깨어짐이고, 석양에 사그라진 그림자인 것을. 그래서 다시는 병환이 서럽다거나 수족이 불편하다고 해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로 다짐한다.


탐이 나서 집착하는 욕망도 번뇌이거늘, 설움을 간직한 사연도 번뇌와 같기에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정신까지 재활을 실천하고프다. 세월이 멈춤이 없는 것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기에 그러하다. 비로소 불행한 지병을 끌어안으니 삶의 방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단금침에 자거나 헌 이불을 덮고 자거나 근심 걱정이 없어야 숙면을 취할 수 있음을 알았고, 산해진미가 아닌 된장찌개나 김치에만 밥을 먹을 수 있어도 감옥에 갇혀서 철창 너머 자유를 그리워하는 죄인보다 얼마나 행복한가를, 병실에 누워서 최후를 기다리는 환자에 비하면 축복이나 다름없음을, 그러므로 건강은 신이 주신 최상의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길게 살았다고 다가 아니고, 건강하게 살았다고 정답이 아니다. 원하는 삶을 살되 남에게 원망을 사서는 안 되는 삶이라야 진정한 삶이다. 안타깝지만 그 삶도 지나고 보면 다 한때라는 사실, 이것이 진실이다.


다시 3월, 금년 봄이 작년 봄과 같다면 무슨 의미이겠는가? 비록 재작년처럼 수영이나 걷기를 활달하게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라산 자락에 깃든 구름에도 철쭉향이 짙게 배어있다는 환상은 나를 거듭나게 하는 봄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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