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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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해마다 이맘때면 한 번쯤 거닐고 싶은 곳, 거기에 마을이 있었다. 스무 가구가 살던 작은 마을이다. 해변가 신작로에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했던 이 마을엔 조(趙)씨가 제일 많이 살았고, 강(姜)씨와 양(梁)씨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서 남들은 이 마을을 조씨 집성촌(한림읍 동명리 거전동(巨田洞))이라 불렀다. 마을 설 촌의 역사가 230년쯤일 거라고 추정하는 것도 조씨 집안의 족보를 근거한 것이다. 조씨가 먼저 이 마을에 정착했고 뒤이어 강 씨를 비롯한 다른 성씨들이 입촌했을 거라는 게 정설이다.

69년 전 이 마을에 난데없는 격랑이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해 4월엔 흉흉한 소문이 울담을 넘나들었고 5월에 들어서자 5·10선거 반대 대열에 휩쓸려야 했다. 우직하게 농사만 짓던 이 마을은 4·3이니 5·10선거니 하는 말엔 아랑곳하지 않으려 애썼다. 살찐 고사리가 막 솟아날 즈음이었다. 4·3과 5·10선거가 이 마을에 재앙을 몰고 올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이 평화스럽던 마을에 청년 셋이 있었다. 갓 스물의 조 아무개와 스물셋의 그의 형, 그리고 이웃 친구인 양 아무개, 그들은 신문명엔 아둔했고 새로운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순진무구한 농사꾼들이었다. 철부지 젊은이들에겐 이념이니, 좌니 우니 하는 말은 생소했다.

어느 날 세 청년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들을 끌고 간 게 경찰이라고도 했고 서북 청년이라고도 했다. 군인이라는 말도 들렸으나 누구도 그들이 왜 끌려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구명을 위해 손 써 볼 것을 권했으나 그들의 부모들은 누구를 붙잡고 어디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설마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야 할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고작이었다. 며칠 후 어느 학교의 구석진 곳에 세 청년의 시신이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세 청년이 총살당한 것이다. 그때 함께 총살당한 사람이 열이라고도 했고 열둘이라는 말도 있었다. 소문은 늘 들쭉날쭉했다.

그들이 왜 총살을 당했는지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철부지 세 청년에겐 법이니, 재판이니 하는 사치스런 절차가 생략되었다. 그해가 다 가는 10월쯤엔 초토화 작전으로 이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대물림하던 집을 헐고 해변가 마을로 기약 없이 떠나야 했던 작은 마을 사람들에겐 엄혹한 현실에 저항할 힘도 수단도 없었다. 경찰지서가 있는 신작로에서 2km 남짓한 이 마을을 작전지역에 포함 시킨 연유를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초토화 작전지역은 해변가에서 5km 밖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왜, 그랬을까. 오직 역사가 알고 국가가 알고 있을 것이다. 국가가 집을 불태운다니 집을 버려야 했고 젊디젊은 청년들이 총살을 당해도 칭원(稱寃)을 삼켜야 했던 마을이다. 그 암울했던 질곡의 현장을 몸소 겪었던 어머님이 세상을 뜬 지도 어언 스무 해다. 이제 이 마을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4월의 어느 날, 69년 전 억지로 비워졌던 텅 빈 마을엔 하염없이 봄비가 추적였다. 지워진 상처를 추스르듯 다문다문 웃자란 잡초가 길섶을 지키고 있었다. 가뭇없이 가슴에 물결이 일었다.

불현듯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수 목소리에 힘을 실었던 4·3추모사 한 구절이 먼 바람처럼 귀청을 맴돌았다.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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