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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제주한라대교수/논설위원

이런 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고 해야할지?

필자는 공공도서관 애용자다. 시설도 깔끔하고 분위기도 좋아 중학생 때 쯤부터 친한 친구와 학교 인근 공공도서관에 다니며 책도 보고 잡지도 보고 시험공부도 했다.

며칠 전 도내의 한 공공도서관에 갔을 때다. 도내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책도 많고 서가도 잘 정리되어 있다. 책걸상과 소파는 물론 매점, 식당과 같은 편의시설도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복사기였다. 학교 수업에 참고자료로 나눠줄 만한 잡지 기사가 있길래 복사기 앞으로 가져갔다. 복사기 두 대 옆에는 ‘프린트·복사 통합관리 시스템’이라 이름 붙은 기계가 있었고, 그 옆에는 프린트·복사 시스템 신규가입을 위한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어라! 이게 뭘까?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하는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신규가입을 해야 하는데 그 절차를 알 수 없었다.

사서를 찾아갔다. 사서가 같이 와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맨 오른쪽의 단말기에서 회원가입을 하고, 그 옆의 ‘프린트·복사 통합관리 시스템’에서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입금을 한 뒤, 다시 복사기에 붙어있는 작은 키보드에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려웠다. 하지만 ‘알겠습니다’하고 혼자 시도해 보았다. 어찌어찌 아이디와 비밀번호 만들기, 100원 입금하기는 성공했으나 복사기 사용이 어려웠다. (A4 크기의 복사물을 가로로 올려놓을지 세로로 올려놓을지 등등….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지면 부족이다.)

미안하지만 다시 사서를 불렀다. 직원용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두 장을 복사해 주었다. 사서가 복사했어도 첫 장은 글씨가 잘려나가 실패. 나라면 또 다시 100원을 입금하기 위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눌러야했을 것이다.

죄 없는 사서에게 약간 불만스런 어조로 복사기 사용의 어려움을 표시했더니,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꿀 예정”이라 한다. 지금 있는 시스템을 살펴보니 단말기를 포함해 일·이백만원은 들었을 것 같다. 다시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하나 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필자는 그날 시스템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80원을 내고 A4 두 장을 복사하기 위해, 영문 알파벳과 숫자를 섞어 네 자리 이상의 아이디와 아홉 자리 이상의 비밀번호를 만들어 가입하고, 100원이나 200원을 투입할 때마다 그리고 복사할 때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이 시스템을 설치할 당시에는 사서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복사의 양이 많았을 것이다. 현금 거래를 관리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을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태블릿 PC, 노트북 사용과 공공도서관 온라인 자료 다운로드가 보편화된 지금은 예전처럼 몇 십 페이지, 몇 백 페이지씩 복사하는 일은 드물다. 그날도 오전 시간 동안 복사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루에 복사 20장’. 이런 식의 제한을 두고 사서가 직접 복사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시스템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양이 조금 많아지면 연두색 조끼를 걸친 자원봉사 학생이 해주면 충분할 것이다. 장 당 40원의 복사비는 돼지 저금통에 직접 넣도록 하고, 나중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써도 좋지 않을까?

모든 일에 많은 돈을 들여 첨단 시스템을 갖출 필요는 없다. 어떤 방식이든 사용자와 제공자의 비용을 낮추고 편리를 높이는 것, 그것이 최선의 시스템이다. 복잡하고 힘든 일을 쉽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정교한 시스템 설계를 고민해야 한다.

반면, 간단한 일에는 간단한 시스템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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