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削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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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삭발은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의 삭발은 단순히 머리를 깎는 의미와는 다른 개연성을 내포한다. 누구나 깎는 머리이긴 한데 삭발이라는 명사를 붙이면 뉘앙스가 달라진다.

삭발에 대한 개념은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자의적 행위이니 누굴 타박할 일이 못 된다. 이따금 개인의 자의적인 삭발이 저항수단으로 변모하는 장면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오죽하면 머릴 깎고 거리로 나설까 하는 연민을 지우지 못했다.

국회 앞에서도, 청와대 가는 길에서도 머리를 깎고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노동자도 깎고 군수도 깎고,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삭발을 한다. 이쯤 되면 언론도 삭발 장면을 대서특필하기에 여념이 없다.

잠잠한 것 같지만 경상북도 성주에서 군수가 앞장서 머리를 깎더니, 김천 쪽에서도 깎겠다고 벼른다는 말이 지면을 달궜던 게 엊그제다. ‘사드’ 배치 장소가 김천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성주는 한시름 놓은 모양이긴 한데, 글쎄다. 그게 삭발의 위력일까. 머리를 깎아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면 더 할 말이 없지만 여운은 개운치 않다.

북한 핵을 방어할 사드라는 전대미문의 병기를 배치하려는데 그쪽 마을 어른들이 죽자사자 머리를 깎았다. ‘사드’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는 안전을 보장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들으면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정부의 강행 일변도 역시 피로감을 가중시키는데 한몫했다. 서로 한 발짝씩만 물러섰더라면 하는 지혜가 아쉬운 대목이다.

본디 삭발은 조선시대 스님들의 전유물이었다. 머리를 깎고 입문의 절차를 거쳐야 스님이 되는 건 불가의 법통이다. 머리 기른 스님은 없다.

삭발의 단초인 단발령(斷髮令)은 1894년 7월, 김홍집 내각의 주도한 근대화 운동으로 갑오개혁의 일환이었다. 당시 단발령은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칙령이다. 이때 변복령(變服令)도 내려진다. 반대의 기치(旗幟)가 하늘을 찔렀다.

이듬해 10월, 고종과 세자가 일본 관리의 강요로 머리를 깎았다. 황제가 몸소 단발령의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때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털은 자르지 못한다고 항변했다.

그는 갑오개혁과 단발령은 나라가 망하는 징조라고 저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배지로 떠났다. 오백년 종사가 망하는 걸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를 절규했던 최익현은 ‘두 가단 발부가단(頭可斷 髮不可斷)’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내 머리는 잘릴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말이다. 그는 일본의 쓰시마에 유배돼 단식하다 1906년 12월 74세로 순국했다. 그때의 삭발은 저항 수단이 아니라 거부의 대상이었다. 그것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머리를 깎았던 건 치욕적인 역사의 기록이다.

이제는 옛날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우리 세대의 삭발에 대한 기억은 군대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때의 추억 중에 삭발은 아릿한 감정을 유발한다. 이 땅에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머리를 깎고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건 불문가지다. 병역을 필한 남자만이 삭발 순간의 아렸던 고초를 안다. 하긴 그 아릿한 고초가 대한민국 남자의 자부심이라는데 방점이 찍힌다.

손아귀의 악력만으로 작동하는 무딘 바리캉으로 머리를 깎았으니 깎이는 게 아니라 뽑히는 거나 진배없었다. 삭발은 대한남아의 상징이라는 말을 믿고 머리를 잘랐던 세월이 이제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우리 세대의 삭발은 저항 수단이 아닌 의무였음을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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