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에도 문(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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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편집국장

지난주 딸아이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간 김에 짬을 내 평소 마음에 뒀던 수원 화성(水原 華城)을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정도의 상식만을 가진 터라 1시간 정도 둘러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으로 흐른다는 ‘두물머리’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레 5.7km(면적 1.2㎢) 성곽을 도보로 답사한 후에야 알았다. 화성은 ‘외유내강’의 내공을 품고 있었다.

1796년 정조의 명에 따라 34개월 만에 축조됐다는 화성은 평지의 도시에 성곽을 두른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복합중심도시인 세종시 격이다. 정조는 공개적으로 천도(遷都)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왕도(王都)를 건설한 것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경기도 화성시 소재 현륭원)을 참배할 때 거처로 사용했던 화성행궁(華城行宮)까지 둘러보자 해는 저물었다.

▲성곽 건축의 꽃으로 불리는 수원 화성은 육중한 성벽을 따라 40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정문인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八達門)을 포함한 사대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공심돈(空心墩),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도 답사를 하면서 자주 눈길이 간 곳은 암문(暗門)이었다.

암문은 성곽에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성 깊숙한 곳에 있어 적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평시엔 사람이나 가축도 이용할 수 있지만, 전시엔 군수물자를 이송하거나 병력이 이동하는 비밀 통로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등 4개의 암문이 있다.

여러 암문을 살펴보면서 ‘철옹성에도 통로는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암문이 없으면 전시엔 성안은 성 밖과 완전히 단절이다. 단절은 고립이고 곧 자멸이다. 그래서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망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살아남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 왕조가 수많은 성을 축조했지만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성의 암문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립만은 피하려는 대비책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불통’ 소리를 들었다. 어떤 이는 “대통령은 1970년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70년대 청와대 생활에서 배우고 느끼고 만났던 것이 인생 전부였다는 뜻이다. 세상과의 불통은 ‘불통 인사’를 낳았고 ‘불통 정책’을 쏟아내면서 정권의 추락을 초래했다. 암문도 있었지만, 그 암문은 ‘십상시’들이 지키면서 ‘주사 아줌마’, ‘기 치료 아줌마’만을 통과시켰다. 비상시 소통 창구가 아니었다. 지금도 굳게 닫아놓고 결사 항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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