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인생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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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구좌의 김여종 시인이 칠순기념시집을 내겠다며 찾아왔다. 그는 내가 중앙문예지에 신인으로 추천한 시인이자 수필가다.

곡절이 있었다. 20년 전, 비인강암 말기 선고를 받은 그가 글쓰기에 매달리면서 등단을 간곡히 원해 오므로 동정이 간 것이다.

곧바로 항암 치료에 들어간 그가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뜻을 둔 게 수필 쓰기였다. 수필 지도를 원해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합병증으로 청력 장애까지 와 있어 소통이 매우 어려운 지경이 돼 있었다. 청각신경이 죽어 가면서 보청기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가 글쓰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멀다고 통원치료를 위해 시내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작품을 갖고 와 수정을 받는다. 필담(筆談)으로 했다. 아픔을 딛고 쓴 글이 낟가리처럼 쌓이면서, 등단 3년 만에 첫 수필집 ‘덤 인생’을 냈다.

암 선고를 받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 이후의 삶은 그냥 삶이 아닌 ‘덤 인생’이다 해 붙인 책 이름이다. 주위의 주목을 끌었다. 소재가 이색적인 데다 글의 진정성이 읽는 이를 감동시켰다. 그 책에 내가 쓴 발문 제목이 ‘운명을 넘어 침잠에 이른 사랑과 소망의 언어’였다.

그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영혼에 불을 댕겨 시 공부에 몰입했다. 공들여 쓰더니 어느 날 불쑥 한마디 꺼내는 게 아닌가. 칠순기념시집을 내겠노라고. 시간을 두고 한 층위만 더 올려놓았으면 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류하기엔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얼마나 열망했겠는가.

그는 시를 쓰며 살고 있는 사람, 시를 쓰고 있어 살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글에 몰두하자 병이 한 발짝 물러선 건가. 발이 닳도록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그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지속성이 놀라웠다.

어느 날, 출력물 뭉치를 들고 왔다. 120 편의 시였다. 시집을 낼 테니 함께 고민해 달라는 주문이다. 시집 제목과 작품의 선정과 배열, 작품해설….

짐을 부려 두고 갔다. 그를 보내고 몇 날 밤낮을 매달렸다. 그와의 인연, 동향이면서 선후배라는 연(緣)이 소중한 데다 그를 문단에 등단시켰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가 암 선고를 받아 눈물겹게 투병 중인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 그의 시가 좀 어설플지도 모르나, 그는 시를 마치 ‘유서라도 쓰듯 마지막 한마디’처럼 쓰고 있지 않나. 허투루 할 일이 아니었다.

그를 집으로 불렀다. 그가 내게 부탁한 것들을 끌러 놓아 둘의 생각을 섞었다. 시집 이름을 ‘덤 인생의 나날’로 하자 뜻을 모았다. 첫 수필집 ‘덤 인생’과 한 맥락으로 하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작품해설의 제목에 고심하다 시가 갖고 있는 기교 이전의 순진성에 맞춰 ‘운명을 넘어 구술(口述)하다’라 했다. 이미 탈고해 놓았으니 퇴고할 일만 남았다.

등으로 지는 햇살을 받으며 문간을 향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마디 건넸다.

“김여종 시인, 수필 공부해 등단하고, 수필집 내며 스무 해를 견뎠네. 이제 칠순기념으로 시집을 내고 있으니 덤으로 십 년을 살았고, 약속대로 두 번째 수필집을 내면서 십 년, 앞으로 여남은 해는 거뜬히 넘길 것이네. 그러면 여든이 되는 걸세. 계속 글에 열중하게. 자네에겐 글쓰기가 의사이고 병원이니….”

안 들리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빛낸다. 눈으로 듣고 있었다. 어깨동무해 마당을 가로질러 손을 흔들었다.

그의 시집 ‘덤 인생의 나날’이 나온 게 2년 전의 일, 김 시인은 지금도 글을 쓰며 투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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