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부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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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수필가

오래전 한림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다.


연구수업 발표를 앞두고, 교실을 가을빛으로 꾸미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화·억새·산열매 등으로 교실을 치장하는데, 반장 엄마가 들에서 캐었다며 연보랏빛 꽃 한 무더기를 안고 왔다.
“아, 쑥부쟁이 꽃!”


“이 들꽃을 좋아하세요?”


나는 이 꽃과의 사연을 말해주면서 기다란 사각화분에 정성껏 심어 창가에 내놓았다. 오후의 햇살이 찾아든 교실엔 가을 향기가 안개처럼 퍼져가고, 내 마음은 어느새 고향 들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쯤이었으리라.


어느 가을날의 오후, 친구들과 함께 솔잎을 긁으러 가까이 있는 고내봉에 갔다. 솔바람 소리뿐인 적막한 들판에는 산새들만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곧바로 흩어져 솔잎 긁기에 바빴다. 쓱쓱 싹싹 솔잎을 긁는 소리가 온 들판으로 평화롭게 퍼져 나갔다. 나도 서툰 솜씨지만 여기저기서 부지런히 긁어모으는데, 한적한 모퉁이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른 들꽃이 눈에 띄었다.


‘이런 조용한 곳에 저렇게 고운 꽃이 자라다니….’


외로움도 무서움도 아랑곳 않는 초연한 표정, 찬란한 햇살 받은 영롱한 빛깔, 정적한 들판에 우주의 신비를 날리고 있는 작은 들꽃의 담대한 모습은, 4?3사건의 서러운 한(恨)으로 마음 졸이며 굳게 닫혀 있던 어린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던 일을 잊어버리고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꽃 안에 나를 담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이 꽃처럼 고요하게, 이 꽃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리라.’


한참 동안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 가며 꽃에 취해 있을 때, 친구들이 날 부르는 소리는 메아리로 들려오고, 설레는 꿈 조각은 하늘 향해 피어올랐다. 어둠이 내리는 산을 내려오면서 벅찬 가슴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게 하였다.

 

쑥부쟁이와의 인연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교실에서 다시 이어진 것이다.


교실 창가에 둔 꽃을 바라볼 때마다 내 안 깊숙이 묻어 둔 어릴 적의 설레던 꿈이 되살아났다. 오늘의 연륜이 있을 때까지 수 많은 꽃들과 만나고 잋혀지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다가온 이 들꽃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흔들어 깨우는 쑥부쟁이의 숨결을 다시 내 안에 담았다. 그 해의 가을을 영원히 내 곁에 묶어 두고 싶어서 서툰 시 한 편을 썼다.

 

               쑥부쟁이 꽃처럼
               하늘빛 내 안에 담아
               한 송이 맑은 영혼으로 살게 하소서

               쑥부쟁이 꽃처럼
               겹겹이 쌓인 그리움 풀어 놓으며
               한 송이 떨리는 영혼으로 살게 하소서
 


화가인 형부가 읽어보고 교원 예술제 시화전 작품으로 침묵의 들판에서 별처럼 빛나는 모습의쑥부쟁이 꽃 한 송이를 그려 주었다. 전시했던 작품은 가훈처럼 거실을 지키고 있다.


쑥부쟁이와 자연스럽게 정 깊은 인사를 나누는 것은 나의 일과이거니, 그 속에 어린 내가 있고, 아무도 모르는 꿈 하나 흐르고 있다. 내 생(生)을 가꾸는 시간이다. 오늘도 쑥부쟁이 꽃은 가슴속 빈 곳을 하늘빛으로 채워주면서, 내 영혼의 뜨락에 향기를 풀어 놓는다.


내 인생은 쑥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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