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愚行)을 되풀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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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성 前 제주국제대 교수/중국언어문화학과/논설위원

다음은 황현(黃玹: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실린 글이다. 세월이 하 수상하여 우리가 정신 줄 놓아서는 안 되겠기에 옮긴다.

1905년 11월9일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는 이등박문, 임권조, 장곡천이 을사오적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을 앞세워 보호조약을 강요했다. 구완희가 위협하며 말했다. “이러시면 벽력(霹靂)이 떨어집니다.” 임금이 벌벌 떨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참정대신 한규설이 분노하며 말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 조약은 허락할 수가 없다.”

이등박문이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고 꾀었지만 임금은 끝내 도장을 찍지 않았고 한규설도 찍지 않았다. 오직 외부대신 이하 각부 대신들만 찍었다. 한규설은 강제조인이 이미 끝난 것을 보고 분노하며 절규했다. 이등박문은 임금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그를 3년간 유배 보냈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 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轎前婢)라는 것이다. 이 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억지로 맺은 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완용의 후손은 한국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다며 일부는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일부 직계후손은 부끄럽다며 그의 묘를 파헤쳐 유골을 수습, 화장하여 강물에 띄웠다.

안중근 의사(義士)의 모친이 사형을 목전에 둔 아들을 만나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법,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의연하게 죽음에 임하고 에미가 죽으면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도록 하자”며 형 집행 시 입도록 마련한 새 옷을 건넸다.

그의 의연하며 반듯한 옥중생활에 감동한 일본인 간수는 선생의 휘호를 받아 간직했고 귀국하여서는 매년 제사를 지냈으며 사후에는 그의 딸이 제사를 지냈다. 일본사를 보면 일본인들은 전시의 적군이라도 비굴하지 않고 장렬히 전사하면 묻어주고 경의를 표하는 예를 갖춘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게릴라에게 혼쭐이 나서 유고 침공을 포기하는데 유고군 1명을 사살하려면 독일군 10명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스위스는 전 국민이 단합하여 무장하고 산악지역을 요새화했기에 독일군이 넘보지 못하고 방치해버렸다.

자고로 국가의 멸망은 외부 침공요인보다는 내부 분란으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주당의원 몇몇이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보복에 대한 항의 명분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이 주중한국대사의 중국 외교부장 면담 요청을 우이독경식으로 거절하던 차였다. 훈계나 듣고 왔을 뿐, 국가안보를 위한 군사 주권적 사안을 굴욕적으로 구걸하듯 매달리는 게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가 조선이 불쌍해서 원군을 보냈을까. 자신들 나라가 전쟁터가 되면 전국토가 쑥대밭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중국어, 영어. 일어, 러시아어가 유창한 외교, 국방 TF(태스크포스) 팀을 꾸리되 주중대사도 중국에서 유학한 골수 중국 통을 선별하여 보내야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지 않던가. 중국은 자신들의 국익에 관련된 사항은 절대 양보 않는 나라라는 점을 명심하고 뭐라 떠들어대던 국방문제는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상책이고 이렇게 해야 상대가 얕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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